[Opinion] 외국어와 함께 배운 것 [문화 전반]

토종 한국인이 배운 3가지 외국어
글 입력 2023.05.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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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국어 구사자'를 프랑스어로 'bilingue'라고 한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고 영어를 잘 하는 프랑스인들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 "Je suis bilingue(나는 2개 국어 구사자다)."라고 한다.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한국어와 영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3개 국어 구사자가 되었다. "너는 그럼 'trilingue'구나!"라는 프랑스인 친구에게, 이제 독일어도 배우고 있으니 곧 'quadrilingue'가 될 거라고 했다. 이에 그 친구는 4개 국어 이상 구사자는 'polyglotte'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4개 국어 구사자라고 하면 멋져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외국에 나가서 살다 보면 한국어를 점차 잊어버리고, 그 나라말도 원어민처럼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유학생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한국어 0.5개, 영어 0.2개, 프랑스어 0.3개 정도 할 줄 알아서 합치면 1개 국어밖에 못 한다'라고들 한다.

 

그래도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능력보다는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다른 문화를 알아가는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애초에 외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몇 가지 언어를 배우면서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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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국어, 한국어


 

나는 어릴 적 말이 늦게 트여서 부모님이 걱정을 하셨다. 통 말이 없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말을 하더니, 한글을 배우고부터는 글을 읽고 쓰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말은 많지 않았다더라. 보통 언어는 말을 많이 해야 는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듣고 읽는 것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새 말하고 쓰는 것도 잘 하게 되었던 듯싶다.

 

중고등학생 때는 맞춤법을 틀리기가 싫어 혼자 인터넷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학교 수업 중에는 국어 문법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한국어 맞춤법 공부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글을 쓰고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면 틀린 부분이 우수수 쏟아진다.

 

영어 등 다른 외국어에 비해 한국어는 문장 구성이 어려운 언어 중 하나다. 한국인들조차 조사를 매번 알맞게 쓰기가 쉽지 않고, 한국어 띄어쓰기는 현존하는 언어들 중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맞춤법 검사기 없이 한국어로 문법상 완벽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글로 배운 언어, 영어


 

다들 그렇듯 초중고 12년 내내 영어를 공부했다.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대부분 문법 위주였다. 말하기나 글쓰기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고 듣기도 비중이 작았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지문에서 사용된 어려운 문법이나 단어를 외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기 위해 존재하는 '수능 영어'라는 언어가 따로 있는 느낌이다.

 

대학생이 되니 친구들이 졸업 조건을 맞추거나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토익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당장 취업 생각도 없어 토익 점수는 필요치 않았지만 '남들이 다 하는 건 한 번쯤 해보자' 하는 마음에 방학 동안 토익 공부를 했다. 유명한 학원에서 주 3일 수업을 듣고 숙제를 열심히 해갔더니 두 달 만에 꽤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영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간판이나 안내문을 읽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현지인과 스몰 토크를 하는 등 무리 없이 여행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에게 충격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늦은 저녁 숙소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도중 배달 기사님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어....... 뭐라고 받아야 하지? 헬로?"라고 친구에게 묻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꽤 오래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여보세요' 하나 영어로 바로 생각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달까.

 

 

 

직접 부딪히며 배운 언어, 프랑스어


 

프랑스어는 입학 전에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했는데도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학교 친구들과 교수님들은 듣기 평가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나 어학원 선생님들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은어나 줄임말도 많았고 무엇보다 말의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미대를 다녀서 실기 수업이 많아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이론 수업은 거의 10%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초반에는 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적어놓았다가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께 가서 '제가 이해한 내용은 이것인데, 잘 이해한 게 맞나요?'라고 확인하곤 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나름의 방법을 만들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업 내용을 녹음한 다음 수차례 반복해서 다시 듣고, 과제로 글을 쓸 때 풍부한 표현을 사용한 글을 쓰려 노력했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에 관련된 단어는 프랑스어로도 외워두었다. 거기에 가끔씩 문법 공부도 하니 1학년이 끝날 즈음에는 소통도 원활해지고 프랑스어로 칭찬을 받게 되었다.

 

공부를 계속하며 주제에 대해 깊게 파고들다 보니 한국어로 된 자료가 거의 없었다. 하는 수없이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논문과 글을 많이 읽었고, 나중에는 미술이나 철학 분야에 있어서는 프랑스인 친구들이 모르는 어려운 단어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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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상 속에서 테마별로 다양한 단어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이다. 요리를 하기 위해 레시피를 찾을 때 프랑스어로 검색을 하면 요리나 식재료와 관련된 단어와 표현들을 알 수 있다. 옷을 구매할 때도 프랑스어로 검색해서 인터넷 쇼핑을 하면 옷의 종류와 재질에 대한 단어를 배운다.

 

직접 옷 가게에 가서 옷을 고를 때는 눈으로 제품을 확인할 수 있어 단어를 배울 기회가 적다. 하지만 '무릎까지 오는 미디엄 사이즈 반소매 벨벳 원피스'를 사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한다고 가정해 보자. '무릎 기장의', '미디엄', '사이즈', '반소매', '벨벳', '원피스' 벌써 여섯 개의 단어를 배우게 된다. 여기에 제품마다 각기 다른 옷의 디테일에 관련된 표현까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은 영어나 한국어로 쉽게 할 수 있어 굳이 어려운 프랑스어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언어 설정을 바꾸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어휘를 흡수하게 된다.

 

 

 

적어도 시험은 합격한, 독일어


 

독일어를 배우고 나서는 단기간에 어학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대학 입학 요건인 B2를 취득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비영어권 국가로 떠나는 것을 고민 중인 누군가가 있다면, '제대로', 그리고 '열심히' 한다면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프랑스어를 배워본 경험 덕분인지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수월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동사 변형과 성수 일치라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의 작동 방식을 미리 이해하니 조금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동사 변형이란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동사의 어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또 프랑스어에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독일어에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 중성명사까지 있는데 여기에 형용사나 동사가 붙을 때 어미를 성과 수에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격 변화'까지 있어 골치가 아팠다. 같은 단어라도 주격, 소유격, 여격, 목적격으로 나뉘어 쓰임에 따라 관사 등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독일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에는 분리 동사, 어순 등 아주 많은 것이 있다. 프랑스어도 연음과 묵음, 시제 등 때문에 배우기 쉽지 않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발음과 숫자를 배울 때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산을 넘고 나면 또 다른 산맥이 기다리고 있다.

 

어쨌든 최대한 이해하고 많이 외우려는 노력으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단어와 숙어, 각 어휘가 동반하는 전치사, 활용하기 좋은 표현이나 문장을 많이 외웠다. 기출문제를 많이 풀고 말하기와 쓰기 연습도 많이 했다. 그렇게 원하는 등급의 자격증은 얻었으나 막상 회화 실력은 부족했다. 독일인들과의 식사 자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책상 공부의 한계를 여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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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사고하는 방식


 

여러 언어를 배우고 자격증 공부를 하며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알게 되었지만 막상 그 언어로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건 한국어와 프랑스어밖에 없는 것 같다. 역시 언어를 배우는 데는 직접 부딪히는 것이 답이다. 언어라는 건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나 감정을 나누기 위한 것이기에,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표현하려는 시도를 해보아야 그 언어를 진정으로 구사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하고 프랑스에서 살면서 배운 건 다르게 사고하는 방식이다. 한국인과 다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작업을 했다. 한국어에는 없는 프랑스어 단어를 알게 되며 그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에 대한 시각도 열렸다. 언제나 두괄식으로 말하는 습관도 생겼다.

 

외국어를 배우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오늘도 외국어를 공부하는 누군가가 새로운 세상이 열림을 느끼며 즐겁다면 좋겠다.

 

 

[김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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