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현실을 비추는 거울 - 미래과거시제

실현가능한 오싹함
글 입력 2023.04.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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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가 현실을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낯선 감각을 느끼게 된다. SF에서는 일상적인 배경을 일그러뜨림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인지적 소외라고 부른다. 이전의 SF가 우주, 지하세계, 혹은 아예 다른 차원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면 팬데믹 이후의 SF는 비교적 가깝고 더 그럴듯한 이야기의 수준으로 진화했다.


전염병으로 멸망한 수도권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아남는 인류의 모습이라든가, 코로나보다 더 한 어떠한 전염병으로 인해 실내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된 어떠한 세계라든가.


그런 의미에서 배명훈이 바라보는 인류에 대한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감정, 완성된 언어 등은 인류만의 독특한 자산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분해하거나 다시 조립하기에는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배명훈은 그것을 너무 간단하게 뛰어넘어 세계를 그려내기에 가끔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헛웃음이 난다.(좋은 쪽으로)

 

 

 

Language



배명훈이 세계를 해체하는 단골 방식은 ‘언어’다. 배명훈은 작가 노트에서 그 이유를 “아마도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여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되묻는다. 언어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표현을 하기 위한 하나의 관습이며 사회적 약속일뿐이다. 그 기저에 깔린 사회가 변하게 된다면 합의에 의해 언어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언어의 미래를 그리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목격한 가장 최근의 변화는 바로 팬데믹이다. 팬데믹이라는 전염병은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종말의 요인이다. 자칫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배명훈은 또 한 번 독자를 놀라게 한다. 


2020년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비말을 차단해야만 외출을 할 수 있었고, 이동 경로를 만천하에 공개하며 비난을 받아야 했던 시기. 그 시기로부터 한참 지난 뒤 인류의 언어는 파열음과 격음 등 발음 시 침이 튈 수밖에 없는 발음을 모두 없앤 평음으로 변화한다. 재난은 일상적인 것을 파괴한다. 공생의 정서는 사라지고 개인과 개인만이 마주하는 세상이 된다. 


배명훈은 이러한 세상의 주된 정서를 ‘혐오’로 규정한다. 그럴듯하다. 팬데믹으로 확인된 가장 단적인 혐오의 예는 동양인, 중국인에 대한 범죄였다. 워킹홀리데이로 떠나 있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쏟아낸 이야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혐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표정을 가리는 일이었다. 표정과 비말을 전부 숨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혐오가 죄조로 발명된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던 혐오를 하나하나 그집어내기 시작한 시대라는 듯이다. 감염병이 전세계에 버지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기 시작앴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는 숨기지도 않았다.

 

<차카타파의 열망>

 


그런가 하면 우리가 겪어본 적 없는 근대의 소리를 재생하기도 한다. <임시 조종사>가 그러한 단락이다. 근대 이전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판소리와 한자어를 돌이켜 하나의 이야기를 짜낸다. 짜낸다는 표현이 더욱 잘 맞는 것 같다. squeeze 말고, knit나 plan의 짜다. 이 단편선의 제목이자 가장 거대한 흐름의 단편인 <미래과거시제>는 영화 컨택트(arrival)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은 선형이 아니며, 그에 따른 언어의 시제도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미래와 과거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짐작.

 

 

 

Emotion



배명훈은 사람의 감정에도 가차 없이 호기심의 칼날을 들이댄다.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껄끄러운 감정들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극한의 슬럼프를 겪던 <홈, 어웨이>의 ‘나’는 슬럼프를 아주 단순하게 벗어날 방법을 얻게 된다. 그 방법은 바로 ‘칭찬’. 어떠한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문장을 마칠 때마다 환호성과 격려의 박수가 쏟아진다.


포인트는 사용자가 팀을 어디로 설정하느냐다. 홈 팀으로 설정할 경우 따뜻한 응원과 격려가, 원정팀으로 설정할 경우 비난과 야유가 쏟아진다.(물론 진짜 야구에서는 홈 팀의 응원도 살벌하지만)

 

 

소설가에게 현장이란 의도된 고립과 고독일 뿐이라 믿었던 나의 소설관은 그깟 함성 몇 번에 간단히 폐기되어버렸다. 잘한다 잘한다 응원 수십 번에 세 계절에 걸친 견고한 슬럼프도 허망하게 스러졌다.

 

<홈, 어웨이 중>

 


어떠한 방식이든 피드백이란 내가 서 있는 곳이 진흙인지 마른 탄탄한 흙인지를 판별하는 기초가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나 혼자’ 모든 것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실제로 독자가 읽기 전까지는 글은 대부분 혼자 쓰니까. 


재택 근무를 하는 친구와 함께 앉아 마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는 내가 쓰던 기사를 들여다보고 “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 이런 걸 어떻게 쓰냐. 대단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우습게도 그 말은 그날 내 엔진이 됐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격려가 실시간으로 내가 한 단어, 한 줄을 적을 때마다 반복된다면 못 끝낼 글이 없겠다 싶은 것이다. 뭐든, 끝을 내는 것이 중요하니. 


 

감정은 배합이었다. 어떻게 맛을 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국적인 음식도 누군가는 간단한 향신료의 배합으로 풀이할 수 있듯, 감정 또한 몇 가지 기본 감정의 섬세한 배합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수요곡선의 수호자 중>

 


결국 인간의 ‘감정’이란 파악할 수 있고, 배합도 가능한 영역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로봇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리만족을 위한 로봇의 탄생이란. 배명훈의 상상력은 실현이 머지않아 보여 가끔 오싹하다. SF의 매력이란 미리 그럴듯한 현실을 겪어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안심하거나, 각성하거나, 걱정하거나 등 다양한 움직임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도 있을 것이다. 팬데믹이 막을 내리고 마스크를 벗을 수 있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한 나의 입을 움직여, 차카타파의 열망을 다해. 


와, 정말 미진 잭, 아니 미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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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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