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낯선 미래에 도달할 친숙한 삶들에게 - 미래과거시제 [도서]

배명훈 신작, <미래과거시제>를 읽고
글 입력 2023.04.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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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할 수 있다는 건 인간 삶의 큰 축복임과 동시에 때로는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이면서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것들에 매력을 느낀다. 

 

모순. 논리적으로는 어긋나지만 우리 삶과 가장 닮아 있는지 모를 특성. 행복한 미래를 꿈꾸면서도 기꺼이 불행을 상상하는 나는 모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과거에 대한 상상은 슬플 때가 많다. 우리는 주로 후회스러운 시간에 행복한 가정을 채워 넣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더 짙어진 슬픔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서만 흐르기에, 순간 달콤했을 상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헛된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상상은 아픈 법이다.

 

반면에 미래에 대한 상상은 보다 복잡한 감정을 수반한다. 기쁠 수도, 슬플 수도, 화가 날 수도, 공포스러울 수도 있는 모든 상상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더 강력하다. 

 

미래 SF 장르가 매력적인 이유는 놀라운 상상력과 독특한 아이디어에 기반해 있기도 하지만, 그 낯설고 신비한 세계가 언젠가 정말로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불안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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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작가의 신작, <미래과거시제>는 나의 상상력으로는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던 미지의 세계가 내 미래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생한 꿈을 꾸게 했다. 그건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 하는 극단의 논쟁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도 있는 미래를 현실로 살아갈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총 9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내가 본 SF 소설 중 가장 낯선 세계의 이야기였다. 어떤 세계는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했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라는 작품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비말 차단이 중대한 과제가 된 시점으로부터 조금 더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우리의 언어체계에서 파열음이 사라진, 한 마디로 ‘차카타파’를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 상상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는 가정이지만, 실제로 파열음이 제한된 본문을 읽으며 어떤 세계인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서한지에게서 날아온 침이 얼굴에 닿았다.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어이없게도 나는 가다르시스를 느겼다. 그 순간 나는 개달았다. “가다르시스를 느겼다”는 말은 반드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침이 잔뜩 튀도록.

 

와, 정말 미진 문명, 아니 미친 문명이었다.

 

- 82p,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中

 

 

이렇게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읽어본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한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처럼. 어설픈 실력으로 갓 영어 문장을 독해하던 그 무렵처럼. 

 

차카타파가 사라진 세계의 글을 읽는 데는 적잖은 수고가 수반되었다. 애매하게 익숙한 단어들을 내가 아는 언어체계 방식으로 해독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나도 모르는 줄임말이 늘어나는 정도의 변화였지, 우리의 언어체계 자체가 변화된 세계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한 변화만이 공포의 대상인 줄만 알았는데, 언어체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야기할 내 일상생활의 불편이 훨씬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처음에 주어진 문장을 따라 할 때는 왠지 우스운 기분이었는데, 한참 지나서 머리가 멍 해졌다. 코로나 초기, 많은 미래학자들은 팬데믹이 종료된 뒤에도 인류가 그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갈 수 없으리라 경고했다. 

 

당시에는 그 예측이 그리 실감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 막 마스크를 벗고 있는 요즘, 무언가 세상이 변한 듯한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마치 언어라는 근본적인 체계에 변화가 찾아온 세상처럼, 아주 당연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아진 것만 같다.

 

 

 

미래과거시제


 

본 단편집의 제목과 동명이기도 한 <미래과거시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감정을 환기시켰다. ‘미래과거시제’라는 우리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문법은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인 내게 생소한 대상이 되었다.

 

 

알트나이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 어미는 일반적인 튀르크예어 미래시제 어미인 ‘-아잨-/-에젝- (-acak-/-ecek-)’의 잘못된 표기나 사투리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미가 사용된 텍스트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니 미래시제라고 할 만큼 애매한 용법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어의 ‘-겠-‘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 화자가 과거시제로 말할 때만큼의 경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어미라는 것. 그것이 알트나이의 설명이었다. 

 

- 91p, ‘미래과거시제’ 中

 

 

“암, 엄?”

 

“맞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나는 알트나이 박사의 강연을 들엄다. 강연이 끝나고 알트나이 박사를 따로 만남다.”

 

- 98-99p, ‘미래과거시제’ 中

 

 

딱히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기에 ‘확신을 가지는 미래’를 가정해야 하는 세계관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실 ‘미래과거시제’라는 용법 자체가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 여행자와의 사랑 이야기. 시간의 퍼즐을 맞추는, 스스로 확신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일에 오직 사랑만을 위해 과감히 뛰어들 줄 아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많은 것들이 변해도 ‘사랑’의 본질은 영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미래에도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어떤 미래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접히는 신들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접히는 신들>이었다.

 

 

자기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 누군가 찾아내 맥박을 타진할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고독했을까. 먼지에 파묻힌 자신의 디자인을 찾아내 하나하나 고이 접어 3차원 공간에 되살려줄 그 귀한 손을 만나게 될 때까지. 

 

- 162p, ‘접히는 신들’ 中

 

 

외계인은 SF 장르와 뗄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존재의 유무조차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캄캄하고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외계인이 살고 있으리라는 작은 믿음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순수함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느꼈던 건 그가 묘사한 외계인의 모습이 흔한 우리 상상 속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었다. 접혀 있는 외계인이라니. 심지어 그 본체도 아닌 영혼의 복제품이라는 상상이 너무나 참신했다. 

 

사실 <미래과거시제>는 내게 읽기 편한 책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식견도 과학적 상식도 한참 부족할뿐더러, 배명훈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미숙한 나의 공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이로운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내게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풍부한 상상력은 어쩔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판소리 형식으로 SF 소설을 쓴다든지, 언어 규칙에 획기적인 변화를 준다든지,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든지. 

 

남들이 하지 않는 파격적인 도전을 한다는 점에서 배명훈 작가를 본 받아야겠다 느꼈다. 동시에 이런 아이디어의 원천은 결국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낯설게 하기’, ‘사회학적 상상력’ 등 내가 잊고 있던 초심의 태도가 다시 떠오른 이유이다.

 

조금 뜬금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미래의 외계인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모두 접혀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 아직은 접혀 있는 우리 안에 빛나는 능력들이 무한히 펼쳐질 그 어느 날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존재들.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 법이라고, 우리는 절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항상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반의 존재


 

흔한 철학적 논제 중에 신체와 정신 중 무엇이 인간의 본질이냐는 질문이 있다. 머리만 가진 사람과 몸만 가진 사람이 합쳐져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주인은 누구냐는 딜레마 같은 것이다. 

 

내 몸이 단순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많은 나는 그럼에도 정신이 더 중요할 거라고 판단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미적지근한 대답이 목구멍에서 차오른다.

 

사고로 몸의 절반을 잃고 기계의 몸과 합쳐진 ‘지하임’.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된 그녀를 딸로 받아들인 아버지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그녀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로부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운동장을 뛰어야 했던 그녀의 두 다리. 

 

여기에서 핵심은 그녀에게 남은 절반이 상체가 아닌 하체라는 점이다. 얼굴도 기계의 것일뿐더러, 본래 인격에 기반하고는 있지만 사고 이전의 기억은 전혀 없는 지하임.

 

예전의 나라면 그녀의 어머니처럼, 새롭게 탄생한 몸이 원래의 주인과는 구별된다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처절하게 운동장을 돌아야 했던 그녀를 상상하니 너무 안쓰러운 마음뿐이었다. 

 

 

지하임은 한사코 자신을 부정하는 안세미 씨에게 무력시위를 하듯 달리고 있었다. 남아 있는 내가 따님의 본질이 아니어서 미안합니다. 뇌가 아니어서 죄송해요. 두 다리일 뿐이어서. 어쨌거나 나는 살아남아버렸고, 이 두 다리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어요. ...(중략)... 이 보잘것없는 절반의 존재로부터, 나는 지하임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지하임이 남긴 절반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세요! 이렇게 굉장하잖아요. 이게 지하임이라고요.

 

- 299p, ‘절반의 존재’ 中

 

 

도저히 그녀가 지하임이 아니라고도, 그렇다고 맞는다고도 할 수도 없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꼈다.

 

 

 

수요곡선의 수호자


 

그래도 역시 첫 수록작인 <수요곡선의 수호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감동적이기도 했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AI는 차갑다. 기계의 몸이니 실제 온도도 낮겠지만, 감정보다는 이성이 훨씬 우월한 존재들일 테니 말이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마사로’는 내가 아는 AI 중 가장 따뜻한 기계였다. 공급곡선이 아닌 수요곡선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태초부터 세상을 향유하기 위해 탄생한 소비 로봇.

 

우리가 상상하는 AI와 함께할 미래는 대게 둘 중 하나이다. 그들에게 정복당한 비참하고 굴욕적인 가정 하나. 혹은 노동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가정 둘로 말이다. <수요곡선의 수호자>에 나오는 인간들은 두 미래 중 전자에 살짝 치우친 중간 어딘가에 속하는 것 같았다.

 

경제 순환 구조에서 공급자로서의 역할은 최소화되고 고작 법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지만, 굳이 생존투쟁을 할 필요도 없는 존재.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삶의 유희도 함께 잃은 존재들.

 

공급곡선을 위해 존재하는 여타 AI들과 달리 수요곡선을 수호하기 위해 탄생한 40 대의 로봇들. 수요곡선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 ‘마음’이라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특성까지 반드시 함양해야 했다. 결국 40 대 중 유일하게 마음을 갖는데 성공한 마사로만이 이 세계의 진정한 수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마사로이지만, 소수 특권층들의 욕심은 인류 전체의 행복을 전혀 탐탁지 않아 했다. 유희가 그를 깨울 때까지 깊은 바닷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던 이유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기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마음을 지닌 우리의 영웅이 말이다.

 

질투심이 많은 나는 때론 영웅의 존재를 못마땅해 했다.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나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고, 그들의 작은 고뇌에도 삶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평범한 엑스트라의 신분이라서. 그 사실이 꽤나 억울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영웅들에서 크게 진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깨어난 마사로에게 유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마사로, 다시 가서 세상을 구해.”

성능이 꽤 좋은 마사로의 기억에 그 말이 영원히 각인되었다.

 

- 55p, ‘수요곡선의 수호자’ 中


 

세상을 즐길 줄 알고 삶을 탐구할 줄 아는, 완벽하진 않지만 진심을 가지고 있는 작은 수호자. 내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영웅, 마사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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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그리던 미래는 신비한 공간이었다. 자동차나 사람이 날아다니고, 우주로 여행을 떠나고, 바닷속에 위치한 집에서 살아가는.

 

그 시절 꿈꾸던 미래에는 걱정이나 고통 따위는 없어 보였다. 세월을 따라 상상은 반비례로 향하고 불안은 증폭됐던 걸까?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갑갑해지고, 고작 떠오르는 건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가정일 뿐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는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빼앗을 거라는 우려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창의적인 일은 인간의 영역이라 위안했는데 ChatGPT가 창작까지 통달하게 될지도 모른단다. 당장의 현실도 버거운데 다가올 미래는 더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니.

 

<미래과거시제>를 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십 년 뒤, 아니 내년도 예측하기 어려운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지만,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혀 낯선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든 결국 평범한 우리들이 함께 살아갈 곳이라고.

 

낯설기만 한 배경 속에 현재의 우리를 닮은 익숙한 삶들을 훔쳐보며, 이들과 함께 라면 그런 세상도 충분히 적응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낙관을 얻었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김소형.jpeg

 

 

[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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