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발 좀 쉽게 씁시다

글 입력 2022.12.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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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큘러하고 텐션이 있는 바디라인을 살려주는 퍼펙트한 쉐입을 강조해 준다.”

“윈터 시즌 어반 컨템퍼러리 보헤미안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심플하고 디테일이 업되어 있어요. 타이트하면서도 릴렉스한 게 니즈입니다.”

 

일명 ‘보그체’의 전형이다. ‘보그체’란 외국 유명 잡지 《VOGUE》에서 딴 것으로 의류나 화장품 같은 패션업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나 글을 조롱할 때 쓴다. 문장에 사용하는 단어 대부분을 영어나 외국어로 대체하고 조사 정도만 우리말을 쓰는 게 기본이다. 무의미하고 장황한 수식어를 나열하고 정체불명의 해괴망칙한 말들이 ‘있어 보이게’ 허세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

 

어이없게도 뜻을 알건 모르건 말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게 보그체의 또다른 특징이다. 그래서 ‘보그병신체’라고도 한다. 자세히 보면 보그체는 한 문장 안에 모순도 있고 비문도 상당하다. 문맥도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부족한 글솜씨를 괴상한 문장으로 가리려고 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패션업계라고 소개했지만 현대미술 같은 추상적인 예술을 다루는 분야도 만만치않다. 유명 갤러리에서 한 미술가의 전시를 알리는 팜플렛에 있는 글이다. 팜플렛은 엄청난 고급 지질에 화려하게 꾸며 한눈에 봐도 비싼 돈을 들여 제작한 티가 난다.

 

“OOO은 동시대의 잊혀 가는 ‘공동체’라는 화두에 주목한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실재한다고 믿었던 공동의 장 즉 동물, 인간,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영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소통할 수 있던 신성한 영역들이 상실되어 감을 깨닫고, 그 평등한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그와 같은 영역을 사라지게 한 현대의 환원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와 수직적인 사회 체계에 일침을 놓는다. OOO은 이번 전시에서도 예술이라는 유연한 방식을 통하여 거대 서사 아래 사라진 영역 또는 소수의 목소리들을 귀담고,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듯이 이들을 하나의 전시로 엮어내며 그 수평적인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몇 번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만 그런 건가? 외국말을 쓰지 않아 ‘보그체’와는 결이 달라 보이고 모두 한국말인데 그래도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도록과 비평지들을 보면 정말 난해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패션이나 미술 같은 추상적인 분야를 말이나 글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는 물론 글쓴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렵고 생소한 어휘를 이것저것 늘어놓는 건 피차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최근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읽었다. 이오덕은 글이 말보다 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말이 바탕이고 말이 글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거다. 그러려면 말이 생활을 담고 있어야 하는데 말의 바탕에는 자연과 일이 있어야 하고 글은 말을 따라가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는데 백퍼센트 동의한다. 책은 모두 다섯 권인데 그 중 1권 앞부분만 읽고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트인사이트]에도 칼럼을 40편 가까이 올렸는데 이오덕의 책을 읽은 후에 썼더라면 훨씬 완성도 높은 글을 됐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를 포함해 글 쓰는 사람, 특히 문화예술과 관련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것만 고쳐도 문장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겠다 싶은 내용을 소개한다. 오늘 다룰 부분은 중국글자말과 일본말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와서 우리말을 망치고 엉터리로 쓰게 하는 ‘밖에서 들어온 잡스러운’ 말이다.

 

 


중국글자말에서 풀려나기


 

이오덕은 여기서 한자말 대신 ‘중국글자말’이라는 표현을 썼다. 마찬가지로 한자는 중국글자, 한문은 중국글로 명확하게 뜻을 가렸다.

 

‘밖에서 들어온 말 가운데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역시 중국글자말이다. 중국글자말은 오랜 역사에서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 이제는 그것을 모조리 없앨 수가 없고, 없앨 필요도 없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중국글자말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글자로 썼을 때나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이내 알아차릴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은 먼저 우리 말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쉬운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한다.’(1권 23쪽)

 

우선, 우리 글자로 썼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알기 힘든 중극글자말.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신문의 스포츠면에 ‘이번 시리즈 패자 XXX’ 이런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고 치자. 그러면 XXX가 이긴(覇者) 건지, 진(敗者) 건지 문맥을 봐야 알 수 있다. ‘3연패’라고 하면 연속해서 세 번 졌다는 건지, 내리 세 번을 우승했다는 건지 중국글자로 쓰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고 맥락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됐던 한 이벤트 회사에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심심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심심(甚深)은 ‘심할 심(甚), 깊을(深)’이다. 결국 ‘매우 깊은’이라는 뜻이다. ‘깊이 사과한다’고 하면 될 것을 공연히 중국글자말을 써서 불필요한 오해와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했다. 그 전에도 ‘오늘’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말을 금일(今日)로 써서 논란을 일으켰고 ‘문해력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까지 오랫동안 말은 있는데 글자가 없어서 중국글자를 쓰다 보니 비롯된 일이다. 말은 잘 쓰지 않는데 글로 남아 있어 그렇다. 한마디로 중국글자의 잔재다. 주로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쓴다. 고리타분한 몇몇 교수를 비롯해 배운 척하는 사람들이 중국글자를 쓰지 않으면 어휘력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가령, ‘곤충채집’ ‘식물채집’에서 ‘채집’이라는 한 단어를 쓰지만 잠자리를 ‘잡았다’, 물고기를 ‘낚았다’, 사과를 ‘땄다’, 도토리를 ‘주웠다’, 고사리를 ‘캤다’ 처럼 우리말을 쓰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어휘를 확장할 수 있다.

 

다음은 입으로 말했을 때 뜻을 알기 힘든 중국글자말. ‘민중 미술의 의의와 방향’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입말로는 이렇게 잘 표현하지 않는다. ‘민중미술의 뜻과 방향’으로 쓰면 누구나 쉽게 이해한다. ‘의의’라고 하면 경상도 사람도 전라도 사람도 정확히 발음하기 어렵다. 거의 책에만 나오는 말이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필히 도장 지참’ 같은 말도 ‘다른 의견’ ‘도장 꼭 갖고’라고 하면 된다. 국도를 지나가다 큰 글씨로 ‘사망’ ‘사고’ ‘다발’ ‘구역’이라는 단어 네 개가 간격을 두고 차례로 설치돼 있는 표시를 본 적 있다. 처음엔 무슨 뜻이지, 하고 의아했는데 지나고 나서 단어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사망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글쟁이들의 문자 쓰는 버릇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따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민중들이 잘 안 쓰는 말을 써서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어 하거나 적어도 너무 쉬운 말을 써서는 자기가 무식하게 보일 것을 염려하는 것이 글쟁이들에게 두루 퍼져 있는 버릇이다.’(1권 43쪽)

 

공연히 어렵게 쓰는 중국글자말도 있다. ‘극적인 첫 조우’(만남) ‘그런 의미가 내포돼 있다’(뜻이 들어) ‘자기 느낌을 표출해야’(나타내야) 서행(천천히) ‘현실을 간과하다’(보아넘겨) 같은. 이 밖에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중국글자말이라도 순수한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을 쓰는 게 좋다. 우리말이 더 부드럽고 아름다울 뿐더러 들었을 때나 글로 썼을 때 훨씬 알기 쉽기 때문이다.

 

‘중국글자말투’도 뜨끔하게 했다. 이건 어떤 중국글자말의 앞이나 뒤에 ~적(的) ~화(化) ~하(下) 같은 말을 붙여 쓰는 버릇인데 말보다 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유식함과 권위를 내비치는 비민주적인 글 쓰는 버릇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고 이오덕은 경고한다.

 

~적(的)

‘이 대작은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오덕은 이 짧은 문장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적’을 모두 빼고 이렇게 고쳤다. ‘이 큰 작품은 형식으로는 추상(화)이나 내용으로는 표현주의인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작품세계를 바로 보여준다.’(1권 62쪽) 

 

사실 나는 이것도 불만이다. 나라면 이렇게 쓰겠다. ‘이 작품은 형식은 추상이나 내용은 표현주의인 화가의 작품세계를 바로 보여준다.’ 이렇게 쓰는 게 학술이나 미술비평의 수준을 낮추는 행위가 될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훨씬 우리말답다. 문장이 가벼워지고 술술 읽혀 뜻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뜩이나 어려운 미술작품을 해설까지 어렵게 해서야 되겠는가. 

 

~화(化)

지난 번 태풍 후에 유력 일간지에 난 기사 제목이다. ‘포스코, 예고된 태풍에 속수무책 정상화 6개월 걸린다.’ ‘정상화’라고 하면 포스코는 비정상이라는 뉘앙스다. 태풍 때문에 망가진 걸 고치는 거니까 ‘회복’이나 ‘복구’라고 써야 한다. 속수무책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속수무책은 손을 묶어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뜻하는데 외부에서 포스코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니다. 언론은 정확한 메시지를 중립적인 표현을 써야 함에도 ‘1등 신문’이라고 하는 매체의 수준이 그 정도다. ‘정상화’처럼 무분별하게 ‘~화’를 남발한 표현을 보자. ‘이러한 작품을 문학작품화하여’(문학작품이 되게 하여), ‘무효화된 반장선거’(무효가 된), ‘기정사실화시키면서’(이미 정한 사실로 되면서)

 

~하(下)

‘이런 상황하에서 벌어지는 일들’(상황에서) ‘경직된 정치풍토하에서”(정치풍토에서) ‘합의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서’(필요하다고 깨닫고) ‘평가할 시점이 됐다는 판단하에”(판단에서)

 

이밖에도 ~성(性) ~감(感) ~상(上) 대(對)~ 같은 중국글자말투는 엄청나게 많다.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일본말


 

‘일본말 일본글은 지난 90년 동안 우리글 우리말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우리말 우리글은 일본말 일본글을 따라 끊임없이 변질되고 있다.’(97쪽) ‘나는 지금까지 일본글을 제대로 번역해 놓은 책을 보지 못했다. 일본글을 우리글로 올바르게 번역하는 일은 일본글의 뜻을 틀리지 않게 우리말로 나타내고 그렇게 옮겨놓은 글이 우리말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번역문장이 뜻도 틀리고 우리말은 아주 엉망인 경우가 많다.’(98쪽)

 

버릇처럼 관행적으로 쓰거나 모르던 사실을 알게 돼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장이다. 나를 포함한 요즘 세대는 일본말 모른다고, 영향 받은 일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말을 직접 배워야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을 배우고 일본글을 읽은 윗세대의 가르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은 일본식 말투를 썼고 일본식으로 글을 썼다. 특히 지식인들조차 일본식 번역투의 글을 우리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말은 우리말과 어순이 거의 같다. 뿐만 아니라 시제, 조사, 어미변화 등이 비슷해 우리말에 들어와 자리잡기가 쉽다. 심지어 우리말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일본식 말과 글을 쓰지 말자는 이유가 단순히 반일감정이나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일본말과 글은 우리말과 달라서 우리말의 명료함과 아름다움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도 않고 뜻이 희미해지면서 의식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본식 표현을 들어내자는 거다. 가장 널리 쓰여지면서도 일본식 표현인지도 모르는 대표적인 것 몇 가지 소개한다.

 

~진다 ~된다 ~되어진다 ~불린다

흔히 피동형으로 쓰이는 이 표현들은 우리말, 우리글이 아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임에도 ‘~되어진다’라고 표현하는 건 마치 저절로 일어난 일이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100억 뇌물 진상 밝혀져야’(밝혀야),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어지는 이 건물은’(만드는), ‘국제 정세의 변화로 보여진다’(보인다),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는 주제는’(다루는), ‘세계의 관심이 한국에 모아지고 있는 시점에’(모이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아이들을 부르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구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기도 한다”(해석되기도), ‘학교 측에 의해 거부되어지고 있다’(거부되고),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솔로몬성전 서쪽 벽’(부르는, 말하는), ‘소위 황금시간대라 불리는 토요일 밤에는’(로 부르는)

 

~에 있어서

‘~에 있어서,가 일본말에서 왔다는 것은 본래 우리말에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글을 읽을 때도 우리는 이 ,於,를 ‘에’ ‘에서’ ‘에게’ ‘부터’로 읽지 ,~에 있어서,라고 하지 않는다.’(1권 111쪽) ‘한국문학에 있어서 자연은 국토로’(한국문학에서), ‘즐겁게 노는 시간, 그에게 있어서는’(그에게는), ‘악기 사용에 있어서는’(악기를 사용할 때)

 

~의

‘우리말에서는 토씨 ‘의’를 잘 안 쓴다. 옛글에도 ‘의’는 좀처럼 잘 안 나오고 ‘의’자가 나와도 그건 지금 쓰는 토 ‘에’의 뜻으로 본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로도 지금도 의는 잘 안 쓴다. 그런데 일본말 노(の)는 어떤가. 일본말에서 ‘の’는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중략) ‘어제 나는 나의 집의 뒤의 나의 집의 밭의 나의 집의 복숭아를 따먹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 격조사 ‘の’가 8번이나 나온다. 일본문법에는 맞다. 일본학자는 여기서 ‘の’를 한 글자도 빼선 안 된다고 했다. 이 글을 우리글로 그냥 직역한 것이다. ‘나는 어제 우리집 뒤에 있는 우리 밭 복숭아를 따먹었습니다.’로 쓰면 우리말 리듬이며 ‘의’가 하나도 안 들어간다. 우리말과 일본말 다르기 때문이다.’(1권 121쪽)

 

‘의’를 빼는 것만으로도 박자와 리듬이 달라진다. 나아가 문장까지 달라진다. 지금 우리가 쓰는 글에 남발하고 있는 ‘의’만 빼도 글이 가벼워지고 리듬이 살아나며 읽기가 훨씬 편해지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이건 내가 해 봐서 안다. 문장이 확실히 바뀐다. 예로 ‘한 마리의 토끼가 달려갔다’라는 문장에서 ‘의’를 빼면 ‘한 마리 토끼가 달려갔다’ 또는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갔다’로 쓸 수 있다. 훨씬 우리말다워진다. ‘~와의’ ‘~과의’ ‘~에의’ ‘~에로의’ ‘~으로부터의’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신해철의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도 ‘의’를 빼야 한다. ‘문학의 밤으로의 초대’ ‘연기에의 집념을 보여줬다’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 같은 표현도 ‘의’를 빼면 뜻이 더 명확해진다. ‘남한에서의 삶이 이렇게 고달플 줄 알았다면’(남한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고달플 줄 알았다면)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의’ ‘적’ 같은 토씨를 넣어 불편하게 하고 의미도 흐리게 만든다. ‘~으로서의’ ‘~으로부터의’도 마찬가지다. ‘이 작은 책은 책 만드는 사람의 노동현장으로부터의 체험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책 만드는 사람이 노동현장에서 체험한 것을 쓴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이럴 때 쓰는 ‘보다’는 우리말이 아니다. 우리말에서는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아졌다’든지 ‘앞산보다 뒷산이 더 높다’고 할 때 쓴다. 즉 부사로 쓰지 않고 조사로만 쓴다. 부사로 쓰는 것도 일본말 ‘より’를 그대로 옮겨 쓰던 버릇이 퍼진 때문이다.’(1권 171쪽)

 

이것 말고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훼손하는 일본식 표현과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글을 우리글답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를 꼭 사서 옆에 두고 참고하기를 권한다. 책 한 권에 1만6천원~1만8천원 정도 하는데 1백6십만원, 아니 2백만원짜리 과외를 받는 것보다 효과가 높다. 장담한다.

 

 


서양말 홍수가 졌다


 

‘옛날 우리 백성들은 중국글자를 모르면 사람 대접을 못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 일본글을 모르면 아주 못난 시골사람으로 천대받았다. –우리 글은 바르게 못 써도 부끄러운 줄 모르면서 영어는 글자 한 자 잘못 쓰면 크게 수치스러운 일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오랜 세월 길들여진 종살이본성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걸핏하면 외국손님 보기에 부끄럽다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도 우리가 마치 외국 사람들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종살이본성에서 나온 말이다.’(1권 199쪽)

 

요즘은 연예인 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소셜미디어로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인스타그램 같은 데 영어철자 하나 잘못 쓰면 난리가 난다. 반면 ‘이따 봬요’ 같은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 별로 못 봤다. 대부분 ‘이따 뵈요’로 잘 못 쓰지만 이게 잘못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또한 이오덕이 말하는 종살이본성과 비슷하다. 

 

~었었다

서양말법이 직접 우리말에 스며든 것 중 하나가 우리말에 맞지 않는 영어의 시제를 흉내낸 것이다. 우리말은 서양말처럼 현재, 과거, 과거완료 같은 시제가 엄격하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어의 완료시제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 걱정이 넓게 차지했었다.’ ‘서울에서 누가 온다고 전화가 왔었다’ 모두 우리말에는 없는 표현이다. 우리말은 현재 과거 미래에다 나아감을 나타내는 ‘~고 있다’ ‘~고 있었다’ “~고 있겠다” 말고는 없다. 서양처럼 과거, 과거완료, 현재, 현재완료, 미래, 미래완료 같은 어법이 없다. 우리말은 시제를 맥락에서 이해하지 문법으로 엄격하게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오덕은 이런 예를 든다. 

 

‘오후에 이발소에 갔다. 나는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머리가 길어서 가야 한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이발소에 들어가니 케케묵은 담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참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아저씨가 막대기를 걸치더니 그 위에 앉으라고 하셨다. 나는 이게 좀 싫다. … 잠시 후 이발을 시작했다. 나는 마네킹, 아니 돌부처같이 꼼짝 말고 앉아 있어야겠다. 가끔 머리카락이 얼굴 위에 떨어져 간지러움을 태운다. 그때 손으로 얼굴을 긁지도 못하고 참는 괴로움! 정말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쓱쓱 박박 꼭 빨래 빠는 것 같이 머리를 주무른다. 윽! 소리가 입안까지 들어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1권 207쪽)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쓴 [이발]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지나간 일을 쓴 이 글의 바탕은 과거형이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현재형으로 쓴 곳이 여기저기 나온다. 그런데도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아이가 머리 깎는 모습이 더 생생하게 그려진다. 왜 그럴까? 이 아이는 자기가 겪은 일을 그대로 잘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그 일이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쓰게 됐고 그러다 보니 글의 끝이 저절로 현재형으로 된 것이다. 이 아이는 이렇게 써야 글의 효과가 극대화할 것이라는 것을 계산하고 쓴 게 아니다. 자기가 한 일을 열심히 전하려다 보니 저절로 이렇게 쓰여진 것이다. 즉 살아 있는 말로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됐다. 시제가 왔다갔다 하는데도 우리말같다. 우리말은 그렇게 시제에 엄격하지 않다. 

 

또 일본식 피동문 말고 영어식 수동태로 된 어색한 우리글도 있다. 우리말에는 없는 영어식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영어 문장은 주어가 빠지면 문장이 성립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글은 맥락에 문제가 없으면 주어를 빼버린다. 그래야 맛이 살아난다. 그게 우리글이다. 문장 성립이 안 되는 서양말 공부를 자꾸 하다 보니 번역투와 어색한 수동형 글이 우리글에 남아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말하고자 하는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지도 못한다. 


서양말 홍수

명동보다 LA 코리아타운에 한글 간판이 더 많다는 얘기가 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확신한다. 한글은 왠지 촌스럽고 영어나 서양말을 써야 세련돼 보인다는 게 이유다. 대표적인 게 요즘 짓는 아파트 이름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만든 말인데 ‘~더 퍼스트’가 들어간 아파트는 ‘근처에 아무 것도 없음’을 뜻한단다. ‘센트럴’은 4차선 이상의 도로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며, ‘리버’나 ‘레이크’가 들어간 이름은 근처에 강이나 호수가 있다. ‘오션뷰’ ‘마리나’는 바닷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며 ‘파크’ ‘파크뷰’는 공원이 가까운 곳에 있음을 나타낸다. 비슷한 이유로 ‘포레’가 있으면 숲이나 산 근처에 있고 ‘메트로’는 근방에 전철역이 있으며 ‘시티’가 들어간 이름은 아파트 근처에 낡고 노후된 건물이 많다는 의미란다. 이렇게 우리말글이 푸대접을 받는 것도 다 이오덕이 말하는 ‘종살이본성’ 때문이다.

 

*


우리글을 파괴하는 외래어, 특히 중국글자말 일본말 서양말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소통을 위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알기 쉽고 친절하게 쓰는 게 독자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말과 글이 수단인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법조, 의료 같은 전문분야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특히 반성해야 한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글쓰기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번역투, 허세, 무슨 말인지 본인도 알지 못하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 소위 ‘있어보이는’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제발 쉽고 자기가 아는 우리말, 우리글을 쓰면 좋겠다.

 

문화예술, 특히 미술비평 분야의 글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또 글을 조금이라도 더 잘 써 볼 욕심으로 읽은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우리글 쓰기에 대한 깨달음과 반성을 하게 하고 좋은 글, 잘 쓴 글을 찾아 읽게 한다. 반면 부작용도 만만치않다. 우선 그동안 내가 썼던 글이 너무 부끄러워진다. 또 포탈이나 신문에서 기사를 볼 때 표현이 거슬리고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들으면 ‘아나운서가, 기자가 무슨 말을 저렇게 해’ 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자꾸 일어난다.

 

 

 

신유빈 (1).jpg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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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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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좋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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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23
    • 저기요. "xxx는 동시대의 잊혀 가는 ~ 초대하고 있다" 이 부분 완전 이해가는데요. 다른 건 그렇다 치는 데 저 부분은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닌 데 무슨 소린지.. 생태주의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있어도 그냥 기본을 말한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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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현아정
    • 모드가 이 글을 읽으면 좋겠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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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 너무 좋은 내용의 글인데요. 미술비평의 예시로 든 글은 저는 이해가 잘 가요. 어느 정도는 한자어로 된 글이 우리나라 언어가 된 부분이 있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말 표현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된 일본어투나 지나친 한자어 사용, 영어 남발은 좋지 않지만 심심한 사과나 문해력이 논란될 정도의 수준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작성된 수없이 많은 문서들, 책, 논문들을 본인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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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게 책에서나 보던 국수주의라는 거구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사람 논리라면 대한민국 국민 전부 유전자 검사해서 중국, 일본, 서양 유전자가 10% 이상 섞인 사람은 전부 국외추방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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