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옥 탈출'을 기억하시나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문화 전반]

텅 빈 놀이터의 주인을 기다리며
글 입력 2022.11.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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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학생들은 뭘 하고 놀까



그런데 말이야, 요즘 초등학생들은 뭐 하고 논대?


아파트 단지의 한 놀이터를 지나쳐 걸을 때 나와 친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몇 년 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초등학생 과외를 맡았던 적이 있다. 한 번은 아이에게 방과 후 친구들과 무얼 하며 노는지 질문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이는 당장 자신만 해도 4개, 친구들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서 잘 놀지 못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 친구는 자신이 겪었던 경험도 들려주었다. 친구가 저녁 약속이 있어 집을 나설 때 엘리베이터에서 수학 학원 가방을 맨 꼬마 아이를 마주쳤는데, 신나게 놀고 밤에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올 때 이번에는 영어 학원 가방을 맨 그 아이를 또 마주쳐서 매우 멋쩍었다나. 

 

분명 어른이 되면 바빠서 놀 시간도 없댔는데, 두 명의 학부 휴학생은, 대낮에 텅 빈 놀이터 앞을 지나며, 지금만큼은 성인인 우리가 초등학생보다 몇 배는 한가해 보인다며 웃었다.


시간을 거슬러, 약 10년 전의 나는 하교 후 단 한 번도 그냥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나와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 앞 놀이터로 우르르 달려갔고, 누군가의 어머님께서 밥 먹을 시간이라며 베란다에서 아이들 이름을 소리쳐 부르실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뛰어놀았기 때문이다. 게임기도 스마트폰도 없이, 가진 거라곤 튼튼한 몸과 마음뿐이었던 우리가, 대체 무얼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까?




추억의 그 이름, '지옥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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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야기할 놀이의 이름을 듣는다면, 90년대 이후 출생자의 대부분은 한순간에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바로 '지옥 탈출'이다. 지옥 탈출은 '지탈', '옥탈', '탈출', '노탈' 등 지역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성인이 된 뒤 전국구에서 온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 동네마다 아주 조금씩의 변주가 있었으나 규칙의 기본적인 골격만큼은 동일했다.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SNS가 보편화되어 있지도 않았을 텐데, 전국의 초등학생들은 대체 어떤 연락망을 통해 이 위대하고 유서 깊은 놀이를 공유했단 말인가?


이 게임을 가장 폭넓게 분류하자면, 놀이기구 위에서의 술래잡기다. 술래가 눈을 감고 숫자를 셀 동안, 아이들은 성 또는 집 형태로 지어진 놀이기구 위로 도망쳐 숨는다. 술래는 숫자를 다 센 뒤 나머지를 잡으러 다니는데, 손이 닿기만 해도 잡을 수 있는 대신 게임 내내 술래는 눈을 꼭 감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내가 술래를 맡았을 때 친구들의 코앞까지 가 놓고도 미처 모르고 지나치거나, 저만치서 팔을 휘저으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술래를 피해 살금살금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술래에게 너무나도 불리해 보이는데, 공평무사한 진행을 위해 술래에게는 특별한 아이템들이 주어졌다. 대표적으로 '왕눈이', 술래가 "왕눈이!"라고 외치면 몇 초간 눈을 뜰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아이템인 '카메라'를 쓰면, 카메라를 외친 술래가 눈을 뜨면 나머지 아이들은 마치 사진을 찍을 때처럼 얼음이 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눈을 뜨게 된 술래는, 기구 아래 원숭이처럼 간당간당 매달리거나, 고양이가 된 마냥 지붕 위에 올라타거나, 미끄럼틀 위에서 정전기로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친구들의 온갖 충격적인 묘기를 포착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고백하자면, 사실 왕눈이나 카메라 없이 아주 몰래 실눈을 뜬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비루한 페어 플레이 정신에 대해,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 뒤늦은 사과를 건넨다.


다시 규칙 이야기로 돌아와서, 술래가 아닌 아이들은 눈을 뜰 수 있는 대신 땅을 밟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술래가 가까워지면 정글북의 모글리가 된 것처럼 놀이기구를 올라타야 했는데, 오직 특수한 경우에만 지면을 밟을 수 있었다. 예컨대 땅을 밟는 대신 깽깽이 발로 걷는다던가, 혹은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아이템이 있었다. 술래가 아닌 아이들에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그러니까 지면을 걸을 수 있는 총 8 걸음을 허용하는 아이템이다.


이 외에도 '체리바', '테디바' 등 동네마다 아이템의 변주가 무궁무진했다. 또한, 다른 아이를 잡으면 술래가 교체되는 방식의 반복이 아니라, 놀이기구의 특정 지점을 탈출구로 정하고 나머지가 모두 그곳에 도달하면 술래가 패배하는 규칙도 추가될 수 있었다.


낭떠러지, 벽, 울퉁불퉁한 구조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꼭 감은 채 돌아다니는 초등학생의 패기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기행이다. 심지어 놀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술래가 넘어져도 아픈 줄조차 모르고 계속했을 정도였으니, 과거의 우리들을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놀이터에 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놀이만 몇 번이고 반복했었는데, 간단한 이 놀이가 뭐가 그렇게 재밌었던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팀 술래잡기 놀이인 '경찰과 도둑', 유서 깊은 고전 '얼음 땡',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런닝맨' 등, 초등학생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없이도, 그저 모이기만 하면, 하루가 짧다고 느껴질 만큼 온갖 놀이를 하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문명의 탄생과 놀이, 호모 루덴스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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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지옥 탈출, 경찰과 도둑, 얼음 땡, 런닝맨, 이 놀이들이 어린 시절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성인이 된 뒤의 세계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스포츠를 떠올려 보자. 최근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고, 식당이나 카페조차 월드컵 응원을 위해 일찍 문을 닫을 만큼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다. 이때, 필드에서 공을 차며 뛰는 선수들의 모습이, 친구들을 잡으려 달려가는 술래의 모습과 어쩐지 겹쳐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설령 성인이 되었다 해도,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우리 삶에서 놀이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인간의 삶 속 놀이가 연속성을 지니는 이유는, 놀이를 즐기는 면모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에 네덜란드 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를 통해 '놀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제시한다.


하위징아는 인간이 누리는 모든 문화와 문명이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인류 문명의 발전 한가운데에는 늘 종교가 있었으며, 종교의식과 제례가 노래와 춤이라는 놀이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뿐만 아니라, 동굴 낙서는 미술로, 지옥 탈출이나 얼음 땡처럼 몸으로 부딪치며 노는 행위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이처럼, 놀이가 문명의 보편성을 탄생시켰다면, SNS의 발달 없이 전국에서 동일한 지옥 탈출 규칙을 공유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서 하위징아는 놀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놀이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졌지만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따라 수행되는 자발적인 행위 또는 일로서, 그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 또 거기에는 어떤 긴장감과 즐거움이 따르며, '일상생활'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따른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도출된 놀이의 특성들은, 놀이가 문명 발전의 기반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적절하다.


예컨대 이런 예시를 떠올려 보자. 놀이의 특성 중 하나는 원칙과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질서와 문화를 습득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내재화할 수 있다. 모든 놀이에는 어겨선 안 될 규칙이 존재한다. 만약 지옥 탈출의 술래가 눈을 떠 규칙을 위반한다면, 놀이 공동체로부터 큰 질타를 받을 것이며 놀이에 참여할 권한을 박탈당한다. 즉, 놀이 규칙의 설정과 그 준수는 집단 내에서의 상호 신뢰와 유대감을 구축하는 사회화의 과정이다. 


또한, 놀이는 자발성과 자유라는 아주 중요한 특성을 보인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 이해하고 그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때는 놀이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완전한 자유와 '비일상' 상태일 때, 아이들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해 놀이를 창조한다. 이 같은 상상력은 그저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삶 총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적인 문화와 문명의 창조에 이바지할 원동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놀 수 있는 땅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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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놀이는 문화와 문명의 근본이자 인간의 본성이고, 따라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 후 자본주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호모 루덴스적 인간 군상은 게으름과 낭비의 프레임에서 해석되곤 했다. 

 

하위징아는 같은 저서에서 '호모 파베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것을 직역할 때는 대장장이나 목수와 같이 '만드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현대 사회로 끌어온다면 무언가 만들고 생산하는 노동은 곧 시장가치의 창출로 이어지므로, 산업 혁명 이후의 세상에서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호모 파베르가 호모 루덴스를 압도한다.


그리하여 호모 파베르의 시대에서, 놀이는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지 못해 비효율적이라며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였다. 험난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놀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일해야 했으니까, 그 답답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듯,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즉, 놀이는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행위이므로, 그저 이윤 창출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놀이를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놀이에 담긴 이러한 의미를 고려한다면, 정말로, 우리는 더 놀 필요가 있다. 노는 게 제일 좋다는 뽀로로처럼 말이다. 한창 뛰어놀 시기인데도, 그들의 호모 루덴스적 면모를 억누른 채 공부에 매달리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그래서일까. 

 

그렇다면,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처방전이 과연 공부를 내려놓고 놀이터로 뛰쳐나가는 것일까? 흔히들 공부를 놀이의 반의어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놀이가 꼭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며, 공부라는 영역에서도 충분히 놀이를 찾을 수 있다.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에 몰입할 때면, 그 어떤 게임을 할 때보다도 큰 충만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공부 그 자체가 아닌 한정된 선택지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관심사를 탐구할 선택지로 오직 공부만을, 그것도 대학 입시를 위한 특정 분야의 공부만을 협소하게 제시한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면서, 정작 교과서 밖 지식을 스스로 탐구하는 아이들에게는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데 왜 시간을 낭비하냐며 꾸짖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어디서든 놀이를 만들어내는데, 그런 이들을 오직 시험공부라는 좁은 영역에만 가두어 두니, 공부 외 관심사를 가진 아이들은 도무지 놀 수가 없다. 


이 같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억압적이며 또 비합리적이라는 점은 입증된 바로, 사회는 이미 서서히 변화하는 추세다. 시험공부 외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성공한 사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임만 한다고 혼이 나던 아이는 커서 억대 연봉의 프로게이머가 되었고, 시험지 구석에 낙서만 하던 아이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만화가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국영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놀이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며 협소한 선택을 강요하는 논리는, 더 이상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게 게임이든 공부든, 스스로 놀이의 영역을 선택하도록 선택지를 확장해야 한다. 수능 공부 외에도 가능성을 펼칠 수많은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껏 놀이하고 설령 넘어져도 도태되지 않도록 지지해 주는, 사회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물론, 혹자는 이 모든 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이 늘 원하는 것만 하냐면서, 어떻게 늘 놀이하며 살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하위징아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즉, 하위징아의 주장은 인간의 다른 본성은 제쳐 둔 채 야생의 호모 루덴스만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양 옆에 나란히 서 있다. 즉, 호모 루덴스와 호모 파베르는 상호파괴 내지는 상호배척이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다. 예컨대 여유롭게 놀이하려면 노동으로 취득한 경제적 부가 필요하고, 때로는 놀이를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고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압도되지 않게끔, 적절한 균형이다.


호모 루덴스들은, 순수하고도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고, 그저 밟을 땅만 있으면 어디서든 '지옥 탈출'이나 '경찰과 도둑' 같이 온갖 창의적인 놀이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밟을 땅 자체가 너무나도 좁다는 것이 문제다.

 

유년기는, 놀이하는 방법을 정해줄 때가 아니라, 뛰어놀 수 있는 드넓은 땅을 제공해 줄 때다. 정말이지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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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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