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뭔가 까먹은 거 같더라니

오늘 향수를 안 뿌렸네요
글 입력 2022.11.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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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더라니,

오늘 향수를 뿌리지 않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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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에 대한 첫 기억이라고 하면 어릴 적 엄마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는 향수병이었다. 부드럽고 포근한 향을 풍기던 엄마의 향수들. 그렇지만 이건 향수에 대한 기억이라기 보단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에 더 가까운 듯하다.


요새는 거의 사라진 대형 팬시점에서는 온갖 것들을 팔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수 역시 매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시절, 레몬 향을 풍기는 5천 원짜리 향수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사지는 않았다. 향수는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어떻게 매일 향수를 뿌리고 다닐 수 있지?'라는 생각은 20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때의 나에게 향은 바디 제품의 영역이었다. 빅토리아 시크릿이나 더바디샵 등에서 향이 좋은 바디 크림/바디 버터를 구매했고 최대치가 바디 미스트였다. 바디미스트는 모두 얼마 쓰지 않고 유통기한이 지났고 나는 나만 맡을 수 있고 금방 사라지는 향에 만족했다. 향수 근처에 얼씬거릴 일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향수를 우연히 찾게 되는 경우를 흔히 '코통사고'라고 한다. 나의 향수 입문 역시 예기치 않은 코통사고와 함께 이루어졌다. 친구가 시향 하고 싶은 향수가 있다고 해서 따라서 매장에 들어갔고, 가벼운 향수 추천에 되돌아온 건 운명적 순간이었다.

 

감귤류 과육 껍질에서 나는 것 같은 자몽과 같은 씁쓸한 상큼함과 레몬 사탕 같은 시지 않은 산뜻한 달콤함. 그리고 연두색 풀잎과 가느다란 나무가 연상되는 푸릇한 느낌으로 마무리되는 향에 그대로 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는 향수 한 병이 들어왔다. ‘어떻게 사람들이 매일 향수를 뿌리고 다니지?’ 했던 나는 출근길 '오늘 뭔가 허전한데?' 하다가 향수를 깜박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향 하나로 나는 향수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 뒤로 몇 개의 향수를 모았고 최근에도 벼르던 향수를 하나 들였다. 지난 몇 년간 도전, 실패, 뜻밖의 발견을 경험했다. 그땐 분명히 좋았는데 지금은 아니거나, 평소 사용하던 것과 너무 다른 향조라서 적응 기간이 필요하거나, 시향하다 우연히 좋은 향을 찾아서 취향의 폭을 넓히거나.

 

취향은 좁은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세한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나는 내가 시트러스한 향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볍고 산뜻하면서 향이 '예쁘다'는 느낌을 주면 대체로 만족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키워드를 정리하자면 '가벼움, 산뜻함, 상큼함, 스파클링, 예쁨'이고 향조를 따지자면 '시트러스, 핑크 페퍼, 화이트 플라워, 장미, 그린 노트'.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과 공감 혹은 추천의 목적을 담아 향수 몇 개를 소개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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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 이탈리안 레몬, 그린 만다린, 플로리다 오렌지, 타마린드, 클레멘타인

타임

시더우드

 

나를 향수의 길로 이끈 '그 향'은 바로 딥티크의 '오에도'였다. 달콤한 시트러스로 발향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달콤하지만 프루티함은 없고 나에게는 시트러스 본연의 상큼, 씁쓸, 달콤이다. 여기서 잔향의 달콤을 빼면 같은 브랜드의 로 드 헤스페리데스가 되고 오렌지 에이드나 청포도 사탕같은 달콤함을 추가한 느낌으로 바이레도의 선데이즈드가 있는데 나는 딱 오에도가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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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가못 오일, 레몬 프리모 오일, 오렌지 비거 레드 오일

장미향, 재스민 잎 향, 주니퍼베리 오일

발삼 퍼, 엠버그리스, 머스크

 

바틀과 수색만큼 향도 예쁜 펜할리곤스의 '루나'. 시트러스에서 플로럴로 가는 길목에 있는 향수라고 생각한다. 스파클링 와인처럼 상큼하게 시작되어서 맑고 은은한 꽃향을 지나 부드럽게 마무리된다.

 

비슷하게 구딸파리의 로즈폼퐁이 있는데 로즈폼퐁에는 없는 상큼함이 루나에는 있고 로즈폼퐁에 있는 존재감 확실한 장미향이 루나에서는 옅어진다. '플로럴이 메인이 아닌 맑고 스파클링한 예쁜 향'을 찾는다면 맑고 상큼함과 장미 묻은 베리의 길목에서 각각 루나와 로즈폼퐁으로 향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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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페퍼, 로즈워터, 라임, 주니퍼, 클라리세이지, 시더우드, 레진, 베티버, 머스크

 

메모의 프렌치 레더. 문턱이 높은 레더의 벽을 확 낮추는 레더 입문향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연필 한 타를 꺼내놓은 것 같은, 약간의 매캐함이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로즈폼퐁의 예쁜 장미향에서 귀여움을 빼고 성숙함과 분위기를 더한 어른스러운 향이다.

 

부드러운 가죽과 은은한 장미향. 탑노트에서 활약할 것 같았던 라임은 장미수와 어우러져 스파클링한 향을 남긴다. 생화는 부담스럽고 본격적인 레더는 어려워서 저어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가을겨울 향수로 잘 어울리는 어른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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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베리 잎사귀, 블랙베리, 아니스 씨앗

로만 카모마일, 아이리스, 아라비안 자스민

바이올렛, 샌달우드, 화이트 머스크

 

롤리타 렘피카의 '몽 오'. 아삭하면서 포근하다. 시트러스가 취향이라 파우더리와는 상극인데 겨울에 찬내 풍기고 다니고 싶지 않아서 물색하다가 발견했다. 전형적인 프루티 플로럴 향수로 꼽히는데 산뜻한 풋내를 풍기는 베리와 파우더리 직전에 머문 포근함이 인상적이다. 싱그럽고 연한 베리가 자연스럽게 서서히 부드러운 향으로 자연스럽게 형태를 바꾼다. 이정도가 가벼운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허용 가능한 최대치의 프루티 플로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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