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로소 여백을 즐기는 마음으로 : 흉터 쿠키

글 입력 2022.11.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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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핀(PIN) 시리즈를 처음 알게 된 건 최진영 작가의 『내가 되는 꿈』을 통해서다.

 

첫인상. 얼추 책 위에 올려둔 손과 너비가 맞아서 기분이 좋았다. 종이책의 매력은 손끝까지 뻗은 미세 신경을 양껏 활용하는 데에 있다.

 

책등과 책 표지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과 직선이 끝나는 곳의 오묘한 뭉툭함, 매끈하지만 미끄럽지 않은 표지를 어루만지고, 얇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락대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

 

종이 위에 놓인 글자 틈으로 파고들다가 어느새 끝자락, 시작할 때와 똑같은 색지를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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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쥐기 좋은 무게와 크기. 'PIN', 그러니까 날카롭게 콕 박힌 것을 시각화한 듯 어딘가 얄팍한 느낌이 마냥 좋았다.

 

그 후로 윤가은 작가의 『도서관 런웨이』, 김혜진 작가의 『불과 나의 자서전』을 차례로 만났다. 표지 전체를 한 폭의 그림처럼 쓰다가 최근 들어서는 액자처럼 사각 안에 그림을 담는 쪽으로 방향을 결집한 듯하다.

 

소설 시리즈만 있는 줄 알았건만, 시인선도 있었다. 이번에 읽게 된 건 이혜미 시인의 《흉터 쿠키》. 이미 전작인 《뜻밖의 바닐라》를 보았던 터라 어느 정도 기대감이 들었다. 게다가 표지를 메운 노란색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그득해 언제 배송이 될까, 손꼽아 기다렸다.

 

막상 받고 나서는 읽기를 하루 이틀 미루었다. 다 못 읽을 것 같아서. 시집을 접해본 건 여러 번이나 한 권을 다 읽은 건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뿐, 다른 시집은 중간에서 멈췄다.

 

빼곡한 글자가 익숙해서인지 시는 늘 어려웠다. 여백이 너무 많다. 자꾸 쉬어가며 생각할 여지를 준다. 느긋한 호흡을 따라가는데 오히려 버거웠다. 그렇다고 휙휙 넘기긴 싫고. 하나하나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정작 끝맺음까지 닿지 못했다. 일종의 강박 비스름한 완벽주의 때문이었는지.

 

한강 작가의 시집을 유일하게 완독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과 시 모두를 지어서일까. 소설이 시 같고 시가 소설 같다. 어느 표현을 봐도 부담스럽지 않고 익숙했다. 익숙함은 새로운 것을 맞이할 때 가장 중요하다.

 

핀 시리즈를 몇 번 봐왔기에 이번엔 그래도 첫 장을 열어젖히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3일. 순식간에 마지막 에세이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 《뜻밖의 바닐라》를 다시 봐야겠다. 글자들이 만드는 문장을, 꾹 눌러 담긴 의미를, 마음껏 가로지르고 뛰어 넘나들 수 있겠다.

 

표지의 노랑, 100페이지 살짝 넘는 가벼운 두께, 작가의 이야기가 담긴 짤막한 에세이, 그리고 작가가 엮어낸 단어들. 모든 요소가 한데 모여 시를, 시집을 즐길 수 있게 했다. 눈이 가는 대로 담고, 떠오르는 생각을 가끔 진득이 붙들고, 다른 가끔이 찾아올 땐 가벼이 스치고. 애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책에 낙서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지만, 자꾸만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어느 시는 밑줄을 내내 긋고 싶어서 인덱스를 붙여두고, 어느 시는 문장이 다 좋았는데도 고심해서 한 문장만 스윽 그었다. 연필은 달팽이가 어딘가로 향할 때마다 만드는 길, 그 길에 놓인 점성과 닮았다.

 

사악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긋는 이의 손가락과 팔이 묻어난다. 그게 좋아서 밑줄을 더 그었던 것도 같다.

 

시집을 집어 들고, 글자들을 탐독하고, 페이지를 넘기고, 마음에 드는 구절에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기쁨을 알기에, 세세한 내부를 미리 보여주고 싶지 않다. 스포일러 같달까. 그래도 살짝 엿보는 재미가 있긴 하니까 조각조각만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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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았던 건 에세이에 적힌 말들이었는데 이건 한 톨도 미리 보여주고 싶지가 않다. 첫 시의 생경함과 에세이 끝의 귀결이 무척 좋았으므로. 다만 끝까지 읽고 나서 보면 다시금 감상에 빠질 한 마디를 남겨본다.

 

혹은 세모

 

'책이 수많은 빈틈으로 이루어진 건축이라'던 문장을 되뇌며, 또 다른 세모들을 차차 읽어나가야지.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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