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여성의 삶 속 다양한 선택에 대하여 - 연극 '선택'

글 입력 2022.09.1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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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대 중앙 테이블에 놓인 임신테스트기에 조명이 비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말이 들려온다.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목소리,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목소리,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이웃집 딸을 흉보는 목소리… 그 말들 사이에서 심란한 듯 왔다 갔다 하는 은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창작집단 LAS의 연극 <선택>은 은수를 비롯한 여러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선택을 다룬 작품이다.

 

 


“이건 내 선택일 뿐이야”



[사진자료] 연극_선택_무대사진001.jpg

 

 

극이 시작될 때 고민 속에서 괴로워하던 은수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배교수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런 은수를 보는 친구들은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특히 수진은 은수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이도 많고 제대로 된 연인 행세를 한 적도 없는 배교수와 결혼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 걱정이 은수에게는 도리어 상처가 되고, 둘의 갈등이 폭발하는 가운데 수진은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을 밝힌다. 그러나 수진이 배교수와 결혼하기로 한 은수를 답답해하듯, 은수는 수진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은수에게 임신중절은 ‘죄’에 가깝지 ‘선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배교수의 고등학생 딸 연아는 남자친구 한솔을 사랑하기에 성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그와 섹스를 하고 싶다. 연아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선택을 했지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피임에 미숙했고, 임신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맞닥뜨린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는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이 전혀 없던 연아는 새엄마 은수의 도움을 받아 임신중절을 택한다. 하지만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힘들어한다.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선택은 사람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른 선택을 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기에 선택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선택 이후 느끼는 것도 다 다르다. 그러한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옳고 그름의 기준을 선택에 들이밀 때,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지는 매우 적어진다. 그 편협한 기준에 휘둘리는 건 결국 선택을 한 여성들이다. 낳으면 낳은 대로, 낳지 않으면 낳지 않은 대로 극중 인물들은 괴로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은수는 선택하는 것을 가지를 잘라내는 일에 비유한다. 나라는 뿌리에서 나도 모르는 가지들이 사방으로 자라나는데, 그중 일부를 잘라내지 않으면 나무 전체가 시들어 버린다고. 모든 가지를 살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은수와 은수의 친구들, 연아, 더 나아가 모든 여성의 선택이 그러한 모습일 것이다. 이들의 선택에는 각각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그때 자신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임신중절을 바라보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다


 

[사진자료] 연극_선택_공연사진006.jpg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인간은 사회에 속한 존재이므로 법과 제도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낙태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임신한 여성이 출산과 결혼이 아닌 임신중절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 이상으로 영향력 있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그렇기에 낙태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도 어떤 임신중절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장된다.


예를 들어, 1980~90년대에 많은 기혼 여성들이 임신한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또는 자녀 수를 조절하기 위해 자의로 또 타의로 임신중절을 했다. 당시에도 버젓이 낙태죄가 존재했지만 산아제한정책을 추진 중이었기에 기혼자의 임신중절은 공공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혼자의 임신중절은 꾸준히 금기시되고 임신중절을 한 여성은 악마화되어 왔다는 걸 생각하면, 임신중절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과연 태아를 위한 것인지 순결 이데올로기를 위반한 여성을 단죄하기 위한 것인지 뚜렷해진다.


<선택>의 배교수와 한솔은 이러한 사회의 인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임신중절이 여성의 선택권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밝힌다.


한솔은 임신 소식을 알리는 연아에게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지만, 그 책임이란 직접 열 달간 아이를 품고 낳아 길러야 하는 연아 입장에서는 공허한 말이다. 그는 임신중절을 하겠다는 연아를 비난하며 의사 지망생인 자신이 어떻게 생명을 죽이는 일에 찬성할 수 있겠냐고 분노한다. 한솔은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연인의 안위가 아니라 아직 눈코입도 생기지 않은 태아에게만 초점을 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는 “자는 건 좋아하면서 낳기는 싫어하는 이기적인 애”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배교수는 딸을 자유롭게 키우는 관대하고 진보적인 아버지처럼 묘사되지만 연아의 임신중절 사실을 알게 되자 돌변한다. 그것은 ‘집안 망신’이고, ‘여자애가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닌 결과’이다. 딸의 감정이나 안위보다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매몰된 그에게 연아는 말한다. 그럼 임신한 은수 언니와 결혼하는 아빠도 몸 함부로 굴리고 다닌 거 아니냐고. 배교수의 이중잣대,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여성의 임신중절을 바라보는 이중잣대가 폭로되는 순간이다.

 

 

 

여성에게 더 많은 선택이 보장되기를


 

[사진자료] 연극_선택_공연사진003.jpg

 


은수의 선택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다. 출산을 결정한 이상 제도권 안의 가정이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배교수와의 결혼은 당연하게 뒤따르는 일이었다. 즉 은수에게 아이를 낳는 선택지와 배교수와 결혼하는 선택지는 같은 것이었다. 은연중에 ‘임신중절을 하고 배교수와 결혼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배교수와 결혼한다’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은수는 제3의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아이를 낳되 배교수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선택지는 과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에게 어떤 낙인이 찍혔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물론 2022년에도 쉬운 일은 아니기에 은수는 용기를 낸다. 그렇게 낳은 아이에게 은수는 배교수의 성이 아닌 자신의 성을 따 ‘허연우’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미성년자의 성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그 자체로 금기시, 죄악시되었기에 미성년자, 특히 여성인 미성년자가 성을 이야기하고 관련된 욕망을 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었다. 최근에야 미성년의 성을 없는 것 취급하기보다 올바른 성교육을 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극에서 잠깐 재현되는 성교육 시간처럼 남학생들을 내보내고 여학생들만 있는 가운데 월경을 시작하면 ‘몸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대신 좀 더 실효성 있는 성교육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선택>의 여러 여성 인물이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고도 각자의 괴로움을 떠안아야 했던 건 여성에게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지'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섹스와 결혼, 임신에 있어 여성에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필요하다. 또 다른 연아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좀 더 안전한 성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싶다는 선명한 욕망을 발견한 은수가 끝내 아이를 낳았듯이,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욕망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갈 길이 멀다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성을 물려받은 연우를 안고 환하게 웃는 은수의 모습이 어둡지만은 않은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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