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혐오가 아닌 공감의 시대 - 혐오의 시대 #4

글 입력 2021.11.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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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질까? 외부적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부적인 요인은 결국 두 가지로 귀결된다. 두려움이 낳은 분노와 자기의심 없는 정의감.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혐오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미워할 수 있는 동기와 원동력을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이야기한 이해와 반성의 메커니즘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안의 혐오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혐오는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이해와 반성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스스로의 혐오를 직시하도록 돕는다. 혐오라는 폭주 기관차에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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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닥터 프로스트)

 

 

그렇다면 혐오는 왜 위험한 걸까?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니편 내편이 있지. 하지만 조금 흔들어주면 같은 색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끼리도 알게 되지. 아, 이 사람도 나와 다르구나. 친구, 연인, 동료, 가족처럼 믿고 지내던 사람들도 더는 믿을 수 없게 돼. 서로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깨지고 결국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혐오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불쾌한 감정을 안겨주거나 범죄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피어난 혐오는 결국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이로 인한 불통을 낳는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희미해지고 자기 이기주의가 극심해진다. 국가나 공동체 같은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한편 혐오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 능력을 떨어뜨리는 역할도 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공감의 선행 조건은 이해다. 그리고 이해의 선행 조건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허나 앞서 말했듯 혐오가 만든 불신과 불통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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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가족부 유튜브)

 

 

이러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얼마 전 벌어졌다. 지난 10월, 여성가족부에서는 데이트 폭력 근절 캠페인의 일환으로 가수 전효성 씨가 출연한 영상을 공개했다. 데이트 폭력 근절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노력하자는 평범한 내용이다. 문제는 해당 영상을 공개한 이후 전효성 씨가 페미니스트라는 논란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비난들이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는 것이다(사실 페미니스트인 것이 논란이 되는 것도 웃기다).

 

그렇다면 해당 캠페인 영상 속 어떤 부분이 소위 말하는 ‘그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그들은 그녀가 영상 속에서 내뱉었던 한 마디를 지적하고 나선다.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 한 마디가 그녀가 페미니스트임을 방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지난 9월,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9년 발생한 데이트 폭력 건수는 9,858건에 달한다. 성폭력은 3만 1396건이 발생했다. 처음 조사를 시작했던 2013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증가세다. 단순 계산을 하면 하루에 약 113명의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외에도 스토킹, 불법 촬영, 가정폭력 등의 범죄 역시 각각 581건, 5556, 5만 9472명으로 2013년에 비해 거의 2~3배가 증가했다.

 

검거 수가 늘었다는 건 폭력 자체가 늘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늘어난 폭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싹 틔운다. 실제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인식하는 여성은 26.7%에 불과하다고 한다. 남성보다 8.4%가 낮은 수치다(사실 남성도 별로 높진 않다).

 

다시 말해, 전효성 씨가 캠페인 영상 속에서 언급했던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는 일부 특정 여성들만의 착각이 아닌 우리 사회 다수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엔 전 남자친구로부터 스토킹에 시달리던 여성이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일까지 벌어지는 와중에 여성들이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정말로 안전한 사회라면 부모들이 자식들의 통금시간을 설정하는 해프닝은 없었을 것이다. 구태여 집에 잘 들어갔냐는 안부 인사를 물을 필요도, 대학 신입생 시절에 동기들과 술 한 잔 후, 밤늦게 귀가하는 여자 동기를 다 같이 바래다주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러 지자체에서 수많은 예산을 쏟아부어가며 여성 안심 귀가 서비스 같은 것을 운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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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가족부 유튜브)

 

 

이렇듯 여성이 사회 안전망에 대해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정량적, 정성적 지표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전효성 씨의 발언이 논란이 되는 건 사실상 납득하기가 어렵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안전이나 치안 수준이 높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사회가 되는 건 아니다. 남과 비교했을 때 안전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느꼈을 때 안전한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란이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통계를 찾아보고 주변 상황에 신경을 썼다면 여성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자연스레 알 수 있다. 허나 이를 페미니스트의 증거로 좌표 찍고, 특정 단체와 개인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동기로 삼는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타인의 처지와 감정에 무심하고 공감하지 못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회 전반의 공감 능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선행 조건은 스스로의 혐오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노력이다. 이를 통해 타인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공감을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혐오의 시대를 탈피하고 공감의 시대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을 말로만 부르짓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미워하고, 비난하는 게 이성적으로 옳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시작은 아마도 ‘차별금지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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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C 코리아)

 

 

다만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사회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가 많이 남아 있다.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이 법이 무고한 피해자를 낳고, 역차별을 만들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한 대통령 후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그의 의도는 법 제정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차별금지법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발언은 아니다. 단적으로 비교해 봐도 차별로 인해 침해받는 개인의 자유가 차별금지법으로 인해 침해받는 개인의 자유보다 더 크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발언은 우리 사회엔 여전히 차별로 인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도 보인다.

 

차별금지법이 지닌 또 다른 오해는 사람들의 관심이 형법적 측면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차별 행위로 규정할 것이며, 이에 대해 얼마만큼의 제재와 처벌을 가할 것인가. 이것이 차별금지법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정답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무엇보다 이는 사람들의 오해와 우려를 만드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더 이상 말만으로는 차별이 불러오는 혐오 등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를 제도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말로만 호소할 게 아니라 체계적인 법과 제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게 차별금지법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처벌을 통해 완성되는 게 아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차별이 옳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바로 교육의 몫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질 차별금지법은 처벌에 대한 규정만 담아서는 안된다. 차별 대신에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폼을 어떻게 가르치고 습득하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겨야만 한다. 아이들 스스로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 원인과 해결 방법을 생각하게 하고, 나와 다른 수많은 사례들을 접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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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천일보)

 

 

지난 2017년 jtbc의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조승연 작가는 브렉시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앞으로의 세계는 좌우의 대립이 아닌, 오픈(Open)과 클로즈(Close)의 대립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은 어느 정도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보인다. 국제적으로는 난민과 이민자를 향한 따가운 시선이 심해졌고 내부적으로는 이념, 나이, 성별, 계층, 생각 등 갖가지 이유로 서로를 힐난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거세졌다.

 

그에 반해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그 사이즈부터가 심상치 않다. 경제 불황, 코로나 19, 환경 오염 등과 같이 개인이나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다 같이 협력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혐오를 넘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벼랑에 내몰리면 누구나 변하는 법이죠.” 과연 그 말은 사실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이번에도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혐오의 시대와 공감의 시대로 나아가는 갈림길 앞에서 우리는 조만간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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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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