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에서 스포츠 경기장을 만나본 기억이 없다. 어쩌다 농구 코트가 무대 위에 펼쳐지게 되었을까? 왜 이들은 농구에 대한 연극을 만들게 되었을까? 이것은 왜 연극으로 만들어질 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은 일면 선택의 문제로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만큼의 노력과 투쟁을 요한다. 실체 없는 관념들과 싸워야 하고,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회 환경을 바꾸어야 하며, 주변의 시선이나 말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용기가 필요하다.
여성에게는 오락으로서의 스포츠 또한 그러하다. 고정된 성 역할 속에서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는 남성성의 영역에 속해왔다.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위해 복무하는 개인’ 즉 국민은 곧 남성을 의미했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훈련된 몸은 남성의 것이었고, 힘과 용기는 남성성의 징표가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산업 자본주의가 도래함에 따라 도시의 산업은 공장제 노동 중심으로 돌아갔고, 이에 적합한 몸은 남성성을 체현할 수 있는 몸이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은 가사노동, 출산, 육아에 적합한 몸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성역할 고정관념은 계속해서 기획되고 재생산되어왔다.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성별 이분법은 여러 차원에서 우리를 억압한다. 성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구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연극은 의미가 있다. 여성들의 농구 이야기는 그래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개개인이 가진 다양한 개성이 만날 때 젠더의 경계를 허물어갈 수 있다.

올여름,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달랑 한 줄>을 보고,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남의 연애>를 보면서 어딘가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달랑 한 줄> 속 인물들의 삶이 당위적 차원에서 쉽게 규정되거나, <남의 연애>의 화자가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선택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미끄러지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 많은 말하기가 필요하고, 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나야 한다.
연극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의 배경이 농구 코트라는 점, 연극이 나아가는 방향이 '농구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에 향해 있다는 점이 반갑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연극은 그 어떤 여성 서사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코트를 누비는 그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존재하는 전형적이고 이분화된 틀을 조금이라도 깰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