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영장의 여자들 - 중장년층 여성들의 운동과 만남의 장소로써의 수영장 [사람]

글 입력 2019.09.0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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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부터 수영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 아주 잦은 술자리, 아주 드문 운동이라는 생활 패턴을 꾸준히 유지했더니 체력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면 일상생활에 아주 큰 지장이 생길 것 같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나마 가장 재미있었고 꾸준히 오래 한 운동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했던 수영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수영장을 검색해 시설도 이용료도 적당한 시립 수영장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지금 다니고 있는, 지하철역으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문화센터의 수영장이다. 강습을 들으면 내 페이스대로 수영하기도 어렵고 맞춰진 시간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주로 오후 1시부터 1시 50분까지 진행되는 자유 수영 시간을 이용한다.


시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시설도 여느 수영장에 뒤처지지 않고 이용료도 합리적인 편이다. 물론 그만큼 이용자도 많아 항상 혼잡하다. 서울 외곽의, 주거지역이 몰려있는 곳에 있어서 더욱더 그렇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으레 그러하듯 이곳에는 이곳 나름의 분위기와 모종의 규칙, 커뮤니티가 있다. 이 글은 내가 짧은 시간이나마 겪어온 수영장의 이와 같은 커뮤니티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00. 중년 여성들의 장소



내가 다니는 1시의 자유 수영은 중년여성들의 시간. 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년과 그 이상의 나이를 지닌 여성의 비율이 많은 편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대학생이나 직장인들, 중년 남성들을 다 합쳐서 2 정도고 나머지 8 정도가 중년 여성들이다.


수영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중년 여성들이다. 이런 풍경은 내가 다니는 곳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수영장에 중년 여성들의 비율이 높다. 양민영 저자의 <운동하는 여자>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수영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거의 최초로 강습이 이루어진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경제 성장의 영향으로 주부들도 드디어 여가를 갖게 됐고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은 등교하는 오전 시간에 건강도 챙기고 다이어트도 할 겸 수영장에 모였다.


지금도 수영과 에어로빅은 주부 유산소 운동의 양대 산맥이다. 특히 수영은 복장만 갖추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고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운동량이 많아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영이 여성적인 운동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너무 격렬하거나 남성적이지 않은, ‘얌전한 운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p.24.



그러니까 수영은 접근성이 좋고, 몸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하도록 권유된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년 여성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다 보니 수영장에는 일종의 중년 여성 커뮤니티가 구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함께 운동하고 씻는 지난 약 4개월 동안 나는 이들의 커뮤니티를 관찰하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01. 혼란?


 

이 시립 수영장을 이용하기 전, 나는 꽤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립 수영장이고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도 이전에 몇 번 이용한 집 앞의 사립 수영장이나 워터파크와 그리 다른 분위기는 아닐 거라는. 하지만 그 생각은 입장하는 순간, 바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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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 1시 자유 수영 타임이 탈의실과 샤워실에 입장할 수 있는 시간은 12시 30분이다. 그때 샤워장과 탈의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1시 이전 타임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과 1시 자유 수영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 수영이 끝난 2시 즈음에도 반복된다. 샤워기 하나를 혼자 쓴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해야 하고, 보통은 두 명이나 세 명이 물줄기 하나를 돌려가며 쓰고, 그마저도 불쑥불쑥 물을 잠시만 쓰겠다는 사람이 생긴다. 나는 처음엔 이 시스템을 잘 몰라서 혼자 샤워기를 쓸 수 있을 만큼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밀치고 이미 샤워하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거나 겨우 자리를 잡아 샤워하기 시작한 나를 밀치며 물줄기를 차지하는 중년 여성들을 목격한 순간 이곳에서는 순서나 질서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위의 샤워장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가 이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처음 느낀 건 혼란함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 가운데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중년여성들의 무례함이나 무신경함에 대한 거부감도 함께 찾아왔다. 샤워실 뿐만 아니라 탈의실에서도, 심지어 물속에서도, 내 공간을 불쑥불쑥 침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밀치고 끼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내가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출발해야 하는데 우물쭈물 하는 다 든 지- 손을 들어서 내 몸을 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운동 과정에서도 혼란은 계속됐다. 분명히 레일이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급이나 고급 레일에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툴게 수영을 하시는 분들 때문에 수영하다 멈추고 하다 멈추고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탈의실에서 들려오는 대화 역시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수영장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흉을 보는 대화, 처음 보는 타인의 신체를 품평하는 대화들이 별다른 여과 과정 없이 오갔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쓱 보고 지나가면서 ‘저 아가씨는 말랐는데 몸에 튼 살이 있네….’라고 중얼거리는 식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수영장은, 특히 중년 여성들이 많은 수영장은 무조건 피해야만 할 곳으로 보인다. 나 역시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엄격한 규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말이기도 하다.


 


02. 자유로움


 

무엇보다 나는 이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제목의 ‘수영하는 여자들’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중에는 수영복의 노출과 함께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가 부각되어 성적으로만 대상화된 이미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시 양민영 작가의 운동하는 여자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사실 여성의 운동복이 성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예로 여성 테니스 선수들은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짧고 불편한 스커트를 입는다. 지난 1998년에는 국내 프로농구 리그의 여성용 유니폼이 원피스 수영복과 흡사한, 일명 ‘쫄쫄이 유니폼’으로 바뀌면서 선수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겉으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리그의 흥행을 위한 노림수, 성 상품화, 여성 혐오 등의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한 여기서도 성별 간의 권력 차이가 어김없이 작용한다.


-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p.19-20.


 

이곳은 그런 대상화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다. 물론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평가하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중장년층 여성들에게 성적인 대상보다는 하나의 운동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워터파크나 휴양지 수영장에서 입었던, 예쁘지만 조금은 불편한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사진을 찍힐 때 보다 좋은 몸매로 보이기 위해 배에 힘을 주고 예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 밋밋하지만 편한 수영복을 입고, 움직이는데 필요한 곳에만 힘을 주고 움직이면 된다. 혹시 조금 민망하게 보일까 봐 하지 못했던 움직임도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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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다양한 몸이 현존하는 공간이자 그 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오는 자유도 있다. 단지 체형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신체 능력의 다양성도 포함한다. 무릎 수술을 해서 발차기가 어려운 분, 수영 호흡법이 어려운 분 등 다양한 신체 능력을 지닌 분들이 함께하고 있다. 나는 당황스럽다고 느꼈던 중, 고급 레일에서의 느린 수영이 사실은 다양한 신체 능력을 지닌 이들이 수영장에서 공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을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느린 사람에게 자신의 페이스를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 수영장의 질서에 녹아들곤 한다.  

 

험담이나 품평이 자유롭게 나올 만큼 언어에 대한 검열도 없다. 이 때문에 수영장에서는 중장년층 여성들의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탈의실에서는 아들과 요양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것, 죽음의 대비에 대한 (때로는 과한) 이야기와 농담, 수술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또 요즘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핫한 운동이 수영 말고 또 무엇이 있는지, 돼지 감자차가 어떤 맛이고 어디서 구해야 좋은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영장은 정보를 공유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03. 나에게 수영장은



이처럼 수영장은 겉으로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들만의 질서로 원활하게 흘러가는 곳이다. 이제 나도 어느 정도 그 질서에 익숙해져, 붐비는 샤워장에서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내 자리를 잡아보기도 하고, 수영할 때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게 능숙하게 속도를 조절해 보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몇몇 중년 여성분들의 큰 목소리와 무신경함, 몇 남성 회원들의 텃세 등엔 깜짝깜짝 놀라거나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면서 내 몸에 대한 주도권을 찾아가는 곳이기에 점점 애착을 느끼게 된다.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수영장의 벽을 딛고 몸이 앞으로 쭉 나아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만족감이 마음속에 천천히 차오른다. 그리고 앞과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다양한 중장년층 여성들의 모습을 본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특히 끊임없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운동하는 여성으로써 나를 상상해 본다. 막막한 미래와 무기력했던 일상들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이처럼 내 몸에 대해 주도권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내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귀찮음을 뿌리치고 수영장에 간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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