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 대가 절벽을 향해 달려간다. 수많은 경찰차의 추격 끝에 벼랑 끝에 다다른 두 여성은 결국 멈추지 않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추락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동차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화면은 멈춘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다. 분명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두 사람이 패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마지막을 이토록 강렬하게 만들었을까?
1991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개봉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두 여성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과 그 여정을 끝맺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도피가 되기까지
영화는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억압받는 델마와 식당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루이스가 함께 여행을 떠나며 시작된다. 델마는 남편의 허락 없이 몰래 집을 나서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총을 챙기지만 사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여행은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설렘으로 시작된 여행은 한순간에 생존을 위한 도피로 변한다.
그 시작에는 할랜이라는 남자가 있다. 술집에서 만난 할랜은 델마에게 호의를 베푸는 듯하지만, 곧 그녀를 성폭행하려 한다. 현장을 목격한 루이스는 총을 겨눠 델마를 구해내지만, 이어지는 할랜의 모욕에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당황한 델마는 경찰에 신고하자고 하지만 루이스는 반대한다. 많은 사람이 델마가 할랜과 춤추는 모습을 보았는데, 누가 그들의 말을 믿어주겠냐는 것이다. 피해 사실보다 피해자의 행동을 먼저 의심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법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두 여성이 도망자가 되는 과정에 있다. 자신을 보호하려던 행동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지만, 이들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문제 삼고,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시선은 3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영화는 루이스의 선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왜 법의 보호를 믿지 못했는지, 왜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웠는지 묻는다.

이후 도피 중 만난 J.D. 역시 두 여성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델마는 그의 매력에 이끌려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J.D.는 결국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도피 자금을 훔쳐 달아난다. 항상 당차고 계획적이었던 루이스마저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놀라운 건 델마의 변화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여행조차 떠나지 못했던 델마는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좌절한 루이스를 일으켜 세우고, 전날 J.D.에게서 들었던 강도 행각을 그대로 따라 해 슈퍼마켓을 털기까지 한다.
물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곧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삶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본 적 없던 델마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처음에는 루이스에게 의존하던 그녀가 이제는 루이스를 이끌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 역시 보호하는 사람과 보호받는 사람에서 서로를 지탱하는 동반자로 변해간다.
여정 중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트럭 운전수와의 사건도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성희롱을 일삼던 운전수를 처음에는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마지막에는 직접 맞서 사과를 요구한다.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운전수의 트럭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관객에게 묘한 통쾌감을 준다. 이전까지 참고 지나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두 여성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그들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장르를 가로지르는 두 여성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곳곳에서 웨스턴 장르의 요소를 차용한다. 광활한 사막과 황야, 총과 카우보이, 끝없이 펼쳐진 도로와 도망자들까지. 익숙한 서부극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관습을 뒤집는다. 전통적인 웨스턴에서 백인 남성 영웅은 광야에 등장해 악당을 물리치고, 위협받는 마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였다. 반면 <델마와 루이스>에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악당을 물리치고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보다, 그들 스스로 법과 사회가 정의한 '악당'이 된다.
이러한 역전은 두 여성의 외형에서도 발견된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 델마와 루이스는 원피스와 스카프 등을 걸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피가 계속될수록 그들의 옷차림은 티셔츠와 청바지 등 활동적인 복장으로 변해간다.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화장을 고치려던 루이스가 립스틱을 차 밖으로 던져버리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휴게소에서 루이스가 자신의 장신구를 벗어 노인의 카우보이 모자와 교환하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영화는 교환의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노인의 옆에 앉아 결연한 표정으로 시계와 귀걸이를 빼내는 루이스의 모습, 그리고 이후 노인의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 관객이 그 과정을 짐작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남성성을 상징하는 소품들이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서부극에서 총과 카우보이 모자, 광야는 주로 남성의 자유와 모험을 상징했다. 그런데 이제는 두 여성이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물론 이를 남성적 요소를 받아들여야만 여성이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자유와 모험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기존의 관습을 뒤집는다. J.D.의 신체적 매력을 강조하는 카메라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볼거리로 활용하던 영화의 관습을 남성에게 적용한다. 한편 두 여성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꾸미던 모습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그들은 점점 자유로워진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적으로는 더욱 위험한 범죄자가 되어가면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자유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델마와 루이스는 도망치는 동안 이전보다 더 많은 선택을 내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회의 보호를 벗어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달리는 도로는 자유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어디까지나 도피의 경로인 셈이다.
그들에겐 내일이 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여성이 자유를 쫓는 모습과 차를 타고 달아나는 로드무비의 특성, 슈퍼마켓을 터는 모습 등에서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원제 <보니 앤 클라이드>)가 겹쳐 보였다. 따라서 그들의 엔딩 또한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총격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일까, 보는 내내 마음을 졸였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달랐다.
그들의 마지막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경찰에 포위된 두 여성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돌아간다 해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선택을 내린다.
물론 절벽으로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면, 그것을 온전한 해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이 결국 죽음을 암시하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는 여성에게 허락된 자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자동차가 추락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대신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을 남겼다.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의 여정은 끝나지만, 관객의 기억 속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영원히 비행하고 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은 비극인 동시에, 영화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도망자가 될 필요가 없는 세상,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두 여성이 끝내 도달하지 못한 곳은 어쩌면 그들이 질주하던 도로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보니와 클라이드에겐 내일이 없었을지 몰라도 델마와 루이스는 다르다. 그들에겐 내일이 있다.
그 내일은 우리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