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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과 진심에 대하여

by 김지오 에디터
2026.10.1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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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라는 건 꽤 묘하다. 그다지 고맙지 않아도 일단 고맙다고 말하고, 그다지 미안하지 않아도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아닌데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일단 하고 본다. 비어 있는 말을 하다 보면,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사실, 공손함을 갖추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공손을 표한다


       

      Brown & Levinson은 1987년 ‘공손 이론(Politeness theory)’을 고안하며, 공손이란 대화 상황에서 체면 위협으로부터 서로의 체면을 지키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체면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소극적 체면(Negative face)’으로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자 하는 욕구고, 두 번째는 ‘적극적 체면(Positive face)’으로 타인에게 호감을 얻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다.


      가령 상대에게 명령을 하는 것은 상대의 자유로움을 방해한 것이므로 소극적 체면을 위협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호감을 표하고 인정하는 것과 정반대의 태도이므로 적극적 체면을 위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대화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을 표하며 상대의 소극적 체면을 보호하고, 상대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을 표하며 상대의 적극적 체면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빈말로써 공손을 표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빈말이다.


      Lynne Murphy 교수의 2012년 TEDx 강연 “American and British Politeness”에 따르면, 영국 문화에서 “thank you”는 일반적으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대화의 단계를 구별하는 책갈피에 가까운 존재다. 다음은 사회언어학자 Dell Hymes가 한 말이다. “British ‘thank you’ seems on its way to marking formally the segments of certain interactions, with only residual attachment to ‘thanking’.”


      일례로 손님이 가게에서 상품의 가격을 물었을 때, 점원이 가격을 알려준 후 손님-점원-손님-점원-손님 순으로 “Thanks” 또는 “Thank you”라는 말이 도합 5번 이루어졌다고 하자. 이들은 정말 너무 고마워서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각자 두세 번씩 한 걸까? 그렇지 않다. ‘이 대화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즉 여기서 “감사합니다”는 표면적으로 고마움을 나타내는 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대화가 끝났다는 표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Lynne Murphy 교수는, 이와 같은 영국인의 감사 표현을 ‘청자의 적극적 체면을 위협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할 말이 모두 끝났다고 해서 마무리 없이 뒤돌아 가 버리면 대화 상대는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비어 있는 감사 표현은 결코 우리에게 먼 일이 아니다. 나는 이메일 맨 마지막에 항상 습관처럼 "감사합니다"를 붙인다. 물론 정말 상대에게 감사한 일이 있어서(예를 들어, 교수님께서 질문에 답변해 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등)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가령 오고가는 메일이 아닌 자료를 제출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메일의 경우, 바로 이름과 “올림”으로 끝을 맺기에는 무례해 보일 것 같고 민망하기도 하여 일종의 마무리 멘트로 "감사합니다"를 붙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빈말을 하고 있는가?

       

      비어 있는 땡큐.jpg

       

       

      그러나, 말은 비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정말 감사해서 감사하다고 하고,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정말 칭찬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칭찬하는 경우가 많다. 말 하나하나에 진심을 다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러한 말을 언제나 빈말로서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감사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 칭찬하는 말이 일반적으로 빈말로 인식된다는 것은, 어떤 말이든 마음을 담아 신경 써서 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그저 "보통 빈말로 하니까!" 하는 통념에 흐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안타깝다.


      일례로, 나는 ‘다음에 한번 보자’는 인사도 대부분의 경우 정말로 ‘보고’ 싶은 사람에게 한다. 이 말이 보통 빈말로 쓰인다는 것도 사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진심으로 보고 싶었던 것인데, 상대방은 그저 인사치레로 들은 경우도 많았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진심이야."를 매번 끝에 붙이기에도 유난이고, 오히려 다른 말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들리고. 보자는 인사에서 진짜 보는 약속을 잡는 것까지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있더라.


      빈말이라는 건 꽤 묘하다. 적당한 선의 인간관계를 위해 어느 정도 진심에 없는 말을 하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빈말로 하고, 어디부터를 진심으로 할지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 않고, 애초에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한 말을 그냥 한 말로 넘겨 버리는 상황, 또는 그냥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버리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피차 곤란하고 당황스럽고 속상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인지 빈말인지를 밝히지 않는 한, 서로 눈치껏 말 안에서 진심과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청자가 화자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청자의 관점에서 독단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류의 가능성은 어떻게 하든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다. 화자의 진심은 묻힐 것이고.


      말이란 알면 알수록 참 어려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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