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꼭 들어맞는 문장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의 말에 묶여버렸던 시간이 있었다. 그이가 자아내는 거의 모든 말과 행동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지만, 질식할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던 단 한 마디에 구속되었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폭력적인 포옹 같았던 말. 그 안에서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사람을 결박하는 말은 사슬일까, 닻일까. <아비정전>을 보고 떠오른 질문이다. 아비(장국영)는 호색한 특유의 느끼하면서 고소한 말로 여성과 관계를 시작한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의 폐부를 파악하고 어루만지는 다정함을 곁들이면서. 방랑하는 사람인 수리진(장만옥)에게는 기억을 약속하고, 선망하는 사람인 루루(유가령)에게는 현실을 은폐하는 식이다. 말할 수 있는 걸 말함으로써 혹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비는 상대를 구속한다.
부드럽게 급소를 찔린 두 여자는 불가항적으로 아비 곁을 떠돌게 된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그이에게 꼭 필요한 말을 주는 것인가? 말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 주체는 누구이든 상관없는 것인가? 그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똑같은 말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 끝나고 알게 되는 것처럼 사실 그 사람의 특별함은 착각에 불과한 것인가?
수리진은 ‘그’라는 특별함은 사라졌다고 결론 내렸고, 루루는 ‘그’만이 선사할 수 있는 말을 계속해서 쫓는다. 어떤 선택이든 그들은 아비라는 이상한 흔적을 묻힌 채 살아간다. 정작 아비는 자신이란 존재가 내뱉는 말의 복잡한 힘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말은 무엇보다 공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말이라는 올가미에 묶여있는 사람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건 친어머니의 말이다.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 채 오직 친어머니의 말을 갖고자 한다. 그것만이 다리 없는 새인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둥지인 것처럼. 친어머니는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자신 역시 어머니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선 아비의 뒷모습은 흔들려 보였다. 나를 옭아매고 있던 유일한 말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나를 땅에 묶어두는 유일한 사슬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테니까. 어머니의 말을 영원한 미결 상태로 남겨두었다면 아비는 조금이라도 더 삶에 가까운 방향으로 움직였을까. 아비에게 그 삶은 무엇일 수 있었을까.
이제는 자주 볼 수 없어 말로 안부를 묻는 것이 익숙해진 친구들이 떠오른다. 때로 진심보다는 그이가 듣기 좋아할 말을 고르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말로써 서로를 공허하게 잡아두는 것은 아닌지. 얄팍한 술수를 쓰는 것은 아닌지. 엔딩 크레딧을 본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영영 떠나가 버리지 않도록 옭아매는 말이 필요하다고. 그 구속 자체가 우리를 죽지 않게 한다고.
사랑을 뜻하는 프랑스어 amor의 어원에 관한 해석이 있다. 죽음을 뜻하는 ‘mor’과 저항을 뜻하는 ‘a’가 합쳐진 단어라는 것.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아비정전> 속 어떤 말도 사랑이 아닌 것이 없다. 죽음만이 허락할 수 있는 휴식을 선사했으니까. 잠시나마 서로를 삶에 붙여놓았으니까. 삶과 사랑에 관한 참으로 낮은 정의다. 왜인지 나는 사랑을 자꾸만 소박하게 만들고 싶다. 멈출 수 없다. 나는 이 삶에 지나치게 머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