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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단 27분을 위한 4800시간의 과정 - 라크리마 [연극]

라크리마, 우리 시대의 눈물

by 장수정 에디터
2026.10.1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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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리뷰에는 연극 '라크리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SYNOPSIS
       

      영국의 공주가 약혼을 발표한다. 왕실은 파리의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에 웨딩드레스를 주문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명예롭고도 잔혹한 여정이 시작된다.


      작품은 드레스가 한 장인의 손에서 또 다른 장인의 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수개월의 제작 기간과 수천 시간의 노동을 거쳐 역사적인 웨딩드레스 한 벌이 완성되어 간다. 참여하는 것 자체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권이지만, 모든 과정에는 철저한 기밀 유지가 요구된다. 본래 비밀스러운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서 이번 작업은 모두를 극도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파리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시작된 여정은 인도 뭄바이의 자수 공방과 프랑스 알랑송의 전통 레이스 공방으로 이어진다.


      노동, 고도의 전문성, 그리고 철저한 비밀로 연결된 세계.


      가느다란 실과 원단 사이로 폭력이 분출하는 작업장. 장인들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채 이어온 관행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몸이 망가져 온 곳이다.


      작품은 장인들이 발휘하는 전문성과 그들의 손에 담긴 힘과 지식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 거듭 질문한다.


      비밀이 강요하는 침묵 속에서, 우리를 파괴하는 것과 우리를 지켜내는 것 사이에 과연 어떤 공간이 존재하는가?
       

       

      라크리마.jpg

       

       

      프랑스의 6개 국립극장 중 하나인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 그곳의 예술감독 캐롤린 기엘라 응우옌이 연출한 '라크리마'는 2024년 초연 이후 아비뇽 페스티벌과 파리, 런던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호평을 받아온 작품이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10월 성남아트센터에서 단독으로 한국 관객을 찾는다.


      영국 공주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4800시간. 공주가 그 드레스의 베일을 쓴 시간은 27분. 이 연극은 이 두 숫자 사이의 거리를 무대 위에 그대로 펼쳐놓는다.

       

       

       

      스크린 안과 밖의 두 세계


       

      이 작품에서 가장 낯선 경험은 스크린이다. 무대 뒤편의 대형 화면은 배우의 얼굴을,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비춘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매, 눈가의 긴장까지 객석 어디에 앉아 있든 놓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다. 연극을 보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이 든다. 한 편의 영화가 실시간으로, 손끝의 바느질과 함께 내 앞에서 상영되는 느낌이랄까. 예술감독 캐롤린 기엘라 응우옌이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이기에 이러한 색다른 연출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라크리마_공연사진01 JeanLouisFernandez.jpg

       

       

      이 스크린이 가장 흥미롭게 쓰이는 순간은 화면 안과 밖이 충돌할 때다. 스크린 안의 마리옹은 영국 왕실 관계자와 통화하고, 디자이너들과의 화상회의에 참여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얼굴, 전문가의 얼굴이다. 그런데 스크린 밖에서 딸이 소란을 피우면 마리옹은 급히 화면 밖으로 뛰쳐나가 딸을 달래고, 동료는 그 틈에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몸으로 화면을 가린다. 스크린 안의 세계와 스크린 밖의 세계가 그렇게 어긋난다. 마리옹은 딸뿐 아니라 의처증 남편 때문에도 일상적으로 압박받고 있지만, 그 압박은 스크린 안으로는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 카메라가 비추는 프레임 바깥에만 존재해야 하는 고통인 셈이다. 이 작품은 스크린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가 보는 전문가의 얼굴 뒤에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쉬지 못하는 3분


       

      연극이 가장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아주 사소한 비대칭에서 온다. 관객이 쉬는 3분 동안에도 압둘은 쉬지 못한다. 무대 위에서, 혹은 스크린 속에서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극장 안의 모두가 숨을 고르는 그 3분이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 장면은 노동의 불균형을 설명하는 대신 관객의 몸으로 직접 체감하게 만든다. 쉬는 쪽과 쉬지 못하는 쪽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안에 나란히 놓일 때, 관객은 자신이 그 불균형의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질문받게 된다.

       

       

      라크리마_공연사진02 JeanLouisFernandez.jpg

       

       

      단 27분 동안 착용할 베일의 자수 문양을 위해 압둘은 진주 25만 개를 손으로 수놓는다. 그리고 영국 공주의 결혼식을 2주 앞두고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 같은 시기, 마리옹은 스크린 안에서 흐트러짐 없는 얼굴을 유지해야하는 그 압박 속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 "그럼에도"가 이 연극에서 가장 잔인한 지점이다. 한 사람의 실명과 한 사람의 자살기도는 드레스의 완성이나 결혼식의 일정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한다. 연출가는 인터뷰에서 극 중 대사 "영국 공주의 드레스 위로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를 언급하며, 이것이 '대영 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을 겨냥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연출가는 이 드레스의 제작에는 '쉬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한 도시의 작업자가 퇴근하면 다른 도시의 작업자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 식으로, 지구 어디에선가는 항상 누군가의 바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응우옌은 이를 직접 "파리에서 하루가 저물 때, 뭄바이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일하고 있습니다. 뭄바이가 잠들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움직이기 시작하죠"라고 표현했다. 한 사람의 신체가 무너져도 이 생산의 리듬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해가 지지 않는' 노동의 실체다.

       

       

       

      라크리마(Lacrima), 우리 시대의 눈물

       

      연출가는 이 작품을 두고 "평생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을 이어 주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파리와 알랑송과 뭄바이의 장인들은 서로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하나의 드레스를 완성하기 위해 각자의 시간과 노동과 시력을 보태고 있다. 무대 위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타밀어가 함께 흘러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연출가는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중심에 두고 약간의 영어를 더할 계획이었지만, 뭄바이의 자수 장인들을 직접 만나면서 타밀어가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같은 언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함께 일하고, 서로를 이해해야 하고, 나란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언어의 공존 그 자체로 무대 위에 놓인 것이다.

       

       

      라크리마_공연사진04 JeanLouisFernandez.jpg

       

       

      제목 '라크리마(Lacrima)'는 라틴어로 눈물을 뜻한다. 연출가는 이 단어를 창작 초기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리도, 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의미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진주나 레이스, 오트 쿠튀르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걸 알기도 전부터, 그가 쓰고 싶었던 건 '우리 시대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진주와 드레스, 장인들의 노동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는 그보다 나중에 찾아왔다. 그제야 연출가는 이 재료들이 오늘날의 고통과 우리를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상징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혔다.


      공주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연출가는 "공주가 서사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공주나 왕비가 중심이 된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많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가 목소리를 돌려주고 싶었던 건 평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화려한 드레스를 완성시키지만 이름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장인들이었다.

       

       

       

      27분


       

      4800시간이 남긴 건 완성된 드레스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조금씩 무너져간 사람들이다. 압둘의 시력, 마리옹이 넘으려 했던 그 문턱, 테레즈의 혹사당한 눈.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객석에 오래 남는 건 공주가 썼던 27분의 베일이 아니라 그걸 가능하게 만든 4800시간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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