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 낮은 칼바람

글 입력 2023.11.2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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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겨울이 도래하지 않은 11월의 추위에도 쉽게 무너지곤 했다. 왠지 모르게 추위에 적응되기 전 찾아오는 11월의 강한 바람은 한겨울의 바람보다 배는 춥게 느껴졌다. 특히 올해는 유난히도 추위가 빨리 찾아왔다. 쓸쓸한 바람을 넘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은 조금 과장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추위라 느꼈다.


추위에 지쳐가던 중 집 앞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열리는 연극 <낮은 칼바람>을 보러 갔다. 극의 배경은 지금 느끼는 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부는 1931년의 만주 한겨울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모인 아홉 명의 인물은 생존을 '위협하는 듯한' 추위를 겪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존에 대한 강한 위협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칼바람 몰아치는 만주의 한겨울에서 이들은 각자 생존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집중했다.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력 그리고 겨울을 묘사하는 바람 소리, 모닥불 소리와 함께 극에 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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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만주 하얼빈 북쪽 대흥안령 아래 외딴 객점.

 

객점 주인 '용막'과 건달 '종수' 그리고 '수염'은 한족 지주들과 어울려 며칠째 투전과 아편에 빠져 있다. 객점의 일꾼 '금석'은 용막의 눈을 피해 글 배우기에 여념이 없지만, 어떤 꿈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다. 비밀 임무를 띠고 있는 '야마모토' 중위와 '마에다' 하사, 돈으로 팔려 온 어린 신부 '부근'과 '맹포수'들은 늑대들의 하울링과 칼바람을 따라 작은 객점으로 몰려오고, 객점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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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그리고 만주라는 공간을 담은 시대극이라는 연극 시놉시스를 보고 당시 시대상에 더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 극에서는 시대상이 부각되어 전개되지 않느다. 대신 개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따라서 주인공이나 악당이 따로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즉 <낮은 칼바람>은 각 개인의 출신이나 성격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자체를 담은 극이다. 

 

극에는 총 9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모두 객점으로 모이기 전, 개인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특정 인물이 주인공으로 또는 악당으로 규정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특정되면 나머지 인물은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당,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 등 주인공을 중심으로 캐릭터가 한정되게 된다. 하지만 <낮은 칼바람>은 모두의 사연을 동등하게 다룸으로써 정해진 역할 보다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첩자로 등장하는 일본인 '야마모토' 중위는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과 총명함 그리고 상황에 맞는 공감 능력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다. 누군가가 마련해 놓은 움막에서 휴식을 취한 뒤, 또 다시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그 곳에 음식을 두고 갈 줄 아는 사람이다. 야마모토의 이런 면모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단순히 일본인이라는 이유로는 반감을 사지 못하도록 한다. 선악의 모호성과 상대성을 깨닫게 하며 그를 '일본인 첩자'가 아닌 '야마모토'라는 한 개인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낮은 위치에 있는 9명의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3명의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인상적이다.


생명과 사람의 진심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금석'은 매사에 겸손하다. 당장 내일의 생존이 보장되지도 않는 하루 하루에도 글 배우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금석보다 더 어린 '복녀'와 '부근'이 있다. 소용돌이 치는 격랑에서도 당차게 '포부'를 외치는 복녀와 부근 그리고 금석의 대사들은 관객들의 마음 속 어딘가를 뭉클하게 만든다. 


그들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금석이 자유롭게 글을 배우고, 복녀는 염원하던 음식집을 차리고, 부근은 당당하게 학교에 다니는 장면을 떠올리면 지극히 평범한 그들이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에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낮은 칼바람>은 1930년 극한의 땅 ‘만주’로 내몰렸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이다. 질긴 생명력으로 그 시대를 살아낸 그 분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그 시대, 그들의 삶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 보자고 한다. 그 분들은 정치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었다. 그 중에 누군가는 저항하고, 누군가는 순응하고, 또 누군가는 적응하며 그 시대를 살아냈다. 삶의 방식에 대한 가치판단은 잠시 잊고, ‘살아낸다’는 의미가 얼마나 숭고한지 나누고자 한다." (정승현 연출)(출처: Arts & Culture)

 

정승현 연출가는 이 연극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가 의도한 바는 이들을 일제강점기 만주라는 배경에 서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친구로, 한 개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교과서에 실려있는 유명한 독립 투사만 살았던 게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생존 투쟁을 했고 그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평범한 개인들이다. 만주에 다녀온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하며 연극을 감상해 보도록 하자. 



[임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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