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선한 낯섦, 불편한 특별 -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

앙상블블랭크가 들려주는 현재 진행형의 클래식 음악
글 입력 2023.05.0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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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서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술의전당이야 늘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는 곳이지만 클래식이라는 세 글자만으로도 머릿속에는 전형적인 음률이 재생됐다. 하지만 지난 4월 29일 진행된 공연 ‘앙상블블랭크 - 작곡가는 살아있다’는 예상과 크게 달랐다. 제목에서도 선언하듯, 역사 속의 클래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클래식을 소개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클래식(classic)’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살피면  말 그대로 서양의 ‘고전’ 음악을 뜻한다. 하지만 전문용어로서의 용례를 살피면 의외로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것이 클래식이다. 이번 공연을 주최한 앙상블블랭크 또한 클래식의 범주에 속하는 지휘자와 실연자들로 구성된 단체지만, 그 행보를 일반적인 인식 속의 고전음악 장르로 섣불리 국한시킬 수는 없다. 이들은 스스로를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며 '새로운 아름다움',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예술단체로 명명한다.


이번 프로젝트도 35세 미만의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한 앙상블블랭크 작곡 공모에 선정된 이응진과 크리스토프 렌하트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각각 1997년생과 1987년생의 젊은 나이로, 지금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작곡가들이다. 최재혁 음악감독 역시 이들을 여러분의 친구이기도, 아들이기도 한 아티스트라고 설명하며 동시대에 살아숨쉬는 클래식을 선보이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공연 프로그램의 구성 또한 인상적이다. 한국 작곡가와 세계 작곡가들을 함께 소개할 뿐 아니라 시기 또한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아우르는 대담하고도 재기발랄한 시도다.


첫 번째 선곡인 레베카 손더스(b.1967)의 'Fury I for Double Bass Solo(2005)'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더블베이시스트 유이삭이 연주한 독주곡으로, 첫 순서부터 현대음악의 전위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 현악기의 다채로운 특수주법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면서 귀로는 더블베이스의 다양한 음색을 탐색할 수 있었다. 때로는 불안정하고 거친 보잉이, 때로는 채찍질 같은 날카로운 태핑이 청각을 넘어선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번 공연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관람객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강렬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안톤 베베른(1883~1945)의 'Langsamer Satz(1905)'은 첫곡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험적이었던 첫곡에 비해서야 안정적인 구성이 돋보였지만 그럼에도 혼란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같았다. 가슴을 에는 듯 극적인 바이올린의 기교와 이를 뒷받침하는 비올라와 첼로의 무르익은 선율이 돋보였다. 통일성 있는 합주 가운데서도 제2바이올린의 섬세한 피치카토가 입체감을 더했으며, 비극적인 출발에서 점차 고요히 잦아드는 감정의 파도가 유려하게 귀를 스쳐지나갔다. 첫곡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기에 이번 공연의 다면적인 면모를 예상케 했다.


세 번째 곡은 트리스탄 뮤라이(b.1947)의 'La Barque Mystique(1993)'로, 단연 최재혁 지휘자의 활약이 빛나는 무대였다. 프로그램 노트의 문장을 인용하면 “위기와 불확실성을 영원한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관념에서 출발하는 작품으로, 지휘자는 곡 전반에 감도는 미묘한 공백과 비선형적인 리듬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연주자들은 악기와 한 몸이 되어 노련하게 연주를 이어가는 동시에도 지휘자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주시했다. 각 악기들은 합주에 임하는 한편으로 각자만의 독립된 세계를 완고히 지키는 듯한 인상을 줬는데, 이 점이 작품이 담고 있는 불균형의 미학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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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정점이었던 네 번째 순서로는 공모에 선정된 이응진(b.1997)이 작곡한 ‘Geste I(2022)’의 세계초연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작곡가에 따르면 독일 현대무용가 피나바우쉬의 ‘봄의 제전’ 속 무용수들의 ‘춤’보다는 하나의 ‘몸짓(geste)’에 가까운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악기들 또한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작곡가보다도 한 명의 예술가로서 클래식 악기를 수단으로 이용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가까울 정도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전통적인 클래식이 주인공의 자리에 악기를 앉혀 최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이끌어내려 한다면, 그 위치를 전복시켜 작곡가의 권위를 극단으로 주인 삼는 작품이었다.


다음 곡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1981~2010)의 'Satka(2008)'로, 잰 종종걸음을 연상케 하는 시작부터 위태로운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 중반부, 쉴틈없이 지저귀는 마무리까지 연주자들이 갈고닦은 고도의 테크닉이 눈길을 사로잡는 무대였다. 극적으로 치닫는 절정 없이도, 자잘하게 쪼개진 박자와 기교만으로도 그 자체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다. 공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던 무대이기도 했다. 또 처음으로 무대 위에 퍼쿠션이 등장해 색다른 맛을 더했다.


퍼쿠션은 다음 순서인 크리스토프 렌하트(b.1987)의 ‘Échos éloquents(2016)’에도 등장했다. 역시 이번 공모에 당선되어 국내초연되는 곡으로, 퍼쿠션을 비롯해 이번 공연에 참여한 연주자들의 거의 모든 인원이 무대에 올랐다. 제목 그대로 특정한 울림을 표현하는 작품이어서인지, 피아노 내부 현을 손으로 직접 두드려 내는 강한 소리나 스틱과 악기의 조합으로 표현되는 퍼쿠션의 다양한 음조가 귀를 사로잡았다. 소리 각각의 메아리에 몰입하다가도, 악기들이 일제히 불협화음을 지를 때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10분가량의 시간 속에서도 다양한 감수성이 쉴틈없이 몰아치는 무대였다.


마지막 순서는 이번 공연을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끝맺는 선곡이었다. 다름아닌 바흐(1685~1750)의 ‘Selections from Musical Offering, BWV 1079(1747)’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바흐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하사한 주제로 완성한 작품으로, 바로크 음악의 정수로 평가받는 곡이다. 당연하게도 이번 공연에서는 가장 주제와 상반되는 순서였다. 그렇지만 가장 고전음악다운 무대를 통해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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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익숙치 않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흐름을 쫓기 바빴다. 하지만 공연이 막을 내리자, 평소와는 다른 감상이 머릿속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우리가 흔히 음악회에서 기대하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듣기 좋은 선율로 심신을 치유받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신경이 배로 날카로워지는 순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통상적인 아름다움에 반하는 소리가 귀를 찌르면 쉽게 피로해지고 신체적인 부담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새롭고 예민한 감각마저 일깨워졌다. 모든 근육은 낯선 환경 앞에서 이완되지 못한 채 계속 긴장을 유지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안테나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무대와 관객석 곧 실연자와 관조자 사이의 벽은 한결 낮아졌다. 낯섦은 곧 새로움이고, 새로움은 또 다른 시도를 낳을 것이기에 그 순간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이 특별했던 경험이었다. 작곡가들의 새로운 도전과 그 도약의 디딤돌이 되어준 앙상블 블랭크의 시도에 늘 신선한 기운이 감돌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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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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