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한 두 연인의 유서 없는 투신.
이 한 줄에서 시작하는 뮤지컬 <사의찬미>는 오랫동안 마니아 관객층을 만들어왔다. 배경은 1926년 8월 4일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선내다. 여기에 과거 세 사람이 만나 연극을 준비하던 시점이 번갈아 펼쳐진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두 사람의 삶을 조종하려는 사내, 그리고 그런 압박에 저항하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이 짜릿한 도파민을 선사한다.
사실 이야기는 새롭지 않다. 현해탄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의 이야기는 연극,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시대를 이기지 못해 함께 자살했다'는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여러 장르 가운데 뮤지컬만이 가진 매력은 이 작품이 뮤지컬의 특성에 충실하다는 데 있다. <사의찬미>는 긴 시간 서사를 쌓아온 배우들과 새롭게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배우들이 함께 캐스팅되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펼쳐냈다. 음악과 기본 서사를 공유하되 배우마다 자신의 해석을 표현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연출이 극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가장 특징적인 역할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사내'다. 사내는 김우진에게 친구로 접근해 윤심덕과 이어주고 함께 연극을 준비하지만, 비관적인 결말을 두고 대립한다. 김우진은 사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내는 노랫소리와 함께 김우진의 곁을 맴돌며 압박한다. 끝내 두 사람이 함께 투신하자, 김우진의 유서를 없애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런 사내의 정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악마와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인 가운데, 그가 왜 김우진과 윤심덕에게 집착하는지는 공연하는 배우마다 표현이 다르고 관람하는 관객마다 의견이 갈린다. <사의찬미>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한 해석과 의견 개진이 가능해 여러 번 보더라도 배우와 페어별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과연 김우진과 윤심덕은 사내의 압박을 피해 삶과 사랑을 완성해낼 수 있을까?
김우진, 윤심덕, 사내라는 세 인물만 등장함에도 <사의찬미>는 여러 구성의 넘버로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라이브 밴드와 함께하는 넘버는 인물의 특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솔로, 인물 간 관계성을 보여주는 듀엣,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전환하는 트리오로 골고루 구성돼 있다.
가령 극 중 생명력과 삶에 대한 의지를 대표하는 김우진은 '저 바다에 쓴다'를 부르며 새로운 다짐을 전달한다. 기다리기보다 행동에 나서는 윤심덕은 '난 그런 사랑을 원해'로 순간의 열망을 노래한다. 사내는 '죽음의 비밀'로 극의 문을 연다. 유일하게 신원 미상인 그는 그 넘버의 리프라이즈로 마무리도 담당한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고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 좌절한다. 극 초반 '이 세상에 없는 곳'에서 함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대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사내는 윤심덕에게 김우진을 죽이라고 종용한다. 윤심덕은 사내와의 넘버 '완벽한 결말' 후반부에서 '이 세상에 없는 곳' 리프라이즈를 부르며 갈등한다.
과거 김우진과 사내의 서사를 그리는 듀엣 넘버는 역동적인 장면과 함께한다. 처음 만나 우정을 쌓는 '사내의 제안'에서는 서로의 사상과 꿈을 나누지만, 사내의 거짓말을 눈치챈 김우진은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에서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그러나 계속 김우진의 곁을 맴도는 사내를 고발하는 '그가 오고 있어'는 극의 대표적인 넘버 중 하나다.
세 사람은 '도쿄찬가B', '날개가 찢긴 한 마리 물새', '시간이 다가와'를 부르며 각자의 감정과 서로를 향한 시선을 드러낸다. 목소리가 합쳐지는 구간과 바통을 이어받듯 호흡을 맞춰 주고받는 구간은 객석의 몰입을 높이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사의찬미>의 넘버들은 인물 각자의 특성과 관계를 확실히 표현하면서도 이야기 전개를 완벽히 뒷받침한다.
관부연락선 선실 모습의 빈무대 (네오프로덕션)
윤심덕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취급에 "난 찰나에 사는 사람이니까"라고 응수한다. 찰나에 진심을 담고자 하는 윤심덕의 넘버는 관객을 매료시킨다. 순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관객이 객석을 찾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사의찬미>는 배우마다 스타일이 다른 공연으로 유명하다. 세세하게는 의상부터 사소한 대사, 액션 등이 달라 캐스트별로 색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 공연하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배우에게 큰 과제지만, 관객에게는 하나의 극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이 때문인지 <사의찬미>는 다관람 관객, '회전문을 도는' 관객이 많은 편이다. 제작사 역시 이들이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실제로 관부연락선을 탄 8월 4일 밤 11시에 진행되는 심야공연이 그 예다.
<사의찬미>는 앞으로도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2013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되며 관객의 열띤 호응을 받아 온 작품의 생명력은 넘버와 배우들의 연기에서 비롯됐다. 제작사 역시 기존에 출연했던 배우와 새롭게 참여하는 배우를 나눠 선보이는 등 관객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배우의 힘만으로 극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공연 자체의 완결성과 매력을 새로운 관객에게 납득시켜야 할 시점이다. 독보적인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공연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서사와 결말을 새롭게 풀어낸 <사의찬미>가 배우를 넘어 작품 자체로 기억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