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보든이야기
1892년 미국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사건.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여성 리지 보든은 1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넷플릭스 《괴물: 리지 보든 이야기》는 이 미해결 사건을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억압받던 여성의 복수극으로 재구성한다.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살인자를 동정하게 만들고, 때로는 그녀의 잔혹한 행동에서 통쾌함까지 느끼게 한다. 과연 우리는 이 매혹적인 복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몰입을 돕는 캐스팅
《괴물: 리지보든이야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배우의 캐스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은 보는 내내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인 리지보든을 연기한 배우는 넋이 나가보이는 얼굴과 분노를 삼키는 얼굴, 보통의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잔혹한 방식으로 사람을 둘이나 죽인 뒤 다시 평온해지는 얼굴이 모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배우 본인이 가진 마스크와 연기력이 어우러져 완벽히 각색된 리지보든처럼 보였다. 리지 역을 연기한 엘라비티(Ella Beatty)는 실제 리지와 닮지 않았고 많이 다르다.
‘리지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 사실을 재현했는가?’에는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줄거리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배우를 찾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매우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한 사람을 더 꼽자면 리지의 새엄마 애비 보든 역할을 맡은 레베카 홀(Rebecca Hall)이다. 애비 보든은 리지를 ‘천치’라고 부르며 리지와 대화할 때 항상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 배우의 날렵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격은 예민한 새엄마를 표현하기에 제격이었고 어떤 아이라도 저런 새엄마를 두었다면 매우 억압된 정서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죽기 직전 최후의 순간, 보든과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서며 보든 부인은 리지에게 “네게 내어준 시간은 절대 되돌려 받을 수 없어. 네 멍한 눈빛과 헛소리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끝도 없이 훔쳐가게 놔두다니 내가 나한테 참 몹쓸 짓을 했어.” 라는 말을 퍼붓는다. 저 대사를 하며 살짝 눈물을 내비치는데, 건조하고 악독하게 대사를 뱉는 것보다 설움과 억울함이 크게 표현되며,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를 돌보는 데 들인 시간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아이를 증오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리지보든은 2살에 새엄마에게 똥기저귀를 갈게 했다는 이유로, 즉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로 진심이 꾹꾹 눌러담긴 폭언을 들어온 것이다. 이 배우의 연기를 보며 화면 너머의 시청자 또한 상처를 받고 마음 여린 아이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며 드라마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방식
"비둘기사건"
이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리지는 부모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못할 만큼 순수한 아이였다. 그녀는 억압된 내면을 비둘기들을 키우며 위로하고 있었다. 비둘기들과 보내는 시간은 유일하게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새엄마는 비둘기가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비둘기들을 도끼로 참혹하게 죽여버린다. 이에 처음으로 감정을 터트린 리지는 아버지에게 찾아가 억울함을 토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조그마한 일로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크게 화를 낸다.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다며 무언가 결심에 찬 얼굴을 한 리지. 나에게 리지의 “이해했어요”의 진정한 뜻은 앞으로 나의 부모를 어떻게 할지 이해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설움을 억압하며 홀로 동물,자연을 위안 삼던 조용한 아이는 없어졌고 이 때부터 리지는 밤마다 방에서 웽웽대는 모기처럼 매우 작지만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리지의 엄마를 보는 아버지"
리지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 그는 리지의 생모의 환영을 본다. 리지를 낳고 죽은, 그가 많이 사랑했던 전아내를 보며 그는 무방비상태가 되고 리지에게 벌을 받는다. 리지의 엄마는 “리지에게 한 번도 잘해준 적 없잖아요.” 라는 말을 하며 리지의 편이 되어준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 내내 상처만 받고 자란 리지를 안쓰럽게 여기는 모성애가 드러나며 가엾은 여자아이를 강조한다.
고어, 동성애 연출과 주제와의 약한 연결, 역사왜곡에도 인상깊게 남은 이유

《괴물: 리지보든이야기》는 고어를 보기 힘들어하는 시청자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잔인한 장면이 검열 없이 표현되고 매회차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쉬운 점은 ‘빅토리아시대의 가부장제에서 탈출, 분노 폭발’ 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나머지 실제사건의 고증에서는 많이 멀어졌다는 것이다. 실화를 조사해보면, 하녀와 리지보든 사이에 연애감정은 없었으며 리지 보든을 향한 학대는 정확하게 증명되지 않았다. 괴물 시리즈 중 ‘여성 괴물’이라는 상징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지만 동성애를 표현하는 장면들은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연출과 주제전달을 위해 왜곡된 거북한 장면이 많았음에도 끝까지 보게 된 이유에 대해 드라마 자체의 요소를 위주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시각적으로 즐겁다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룬 또 다른 영화 리지(2018)과 비교했을 때 넷플릭스 괴물시리즈의 리지보든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을 고증하고, 더 아름다운 의상을 영상에 담기 위해 노력한 느낌을 준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의상과 헤어스타일, 저택과 가구를 보며 시각적 요소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마치 한 편의 문학작품을 보는 것처럼 좋은 장치들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도끼’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물건이고 죄와 벌을 상징하고 있다. 아버지는 리지에게 도끼로 41번 찍혀 살해당한다. 아버지는 장의사였는데, 유가족에게는 큰 관이 필요하다며 많은 돈을 요구하고 실제로는 작은 관을 사서 많은 이익을 취한다. 그리고 작은 관에 고인을 맞추기 위해 시신을 도끼로 훼손한다. 아버지는 슬프게도 자신이 이름까지 지어주며 사랑했던 도끼로 죄를 지었고, 벌을 받았다.
또한 드라마 초반부의 하녀 브리짓의 등장과 살인 증거 인멸 장면이 수미상관처럼 맞아 떨어진다. 리지는 자신을 빨리 결혼시켜 집에서 내쫓고 싶어하는 새엄마의 지도를 받아 청혼 직전 소파에서 기절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 월경이 시작되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파에는 피가 묻는다. 그 소파를 끔찍이 아끼던 새엄마는 리지에게 질책과 폭언을 하는데 그 때 새로 온 하녀 브리짓은 그 피를 완벽하게 지워내 신임을 얻고 집으로 들어온다. 새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피 지우기 기술'은 이후 그들을 죽이고 증거를 인멸하는 데에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괴물: 리지보든이야기》의 우스꽝스러운 연출은 드라마가 무조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도록 한다. 리지와 브리짓의 첫 번째 살인시도는 굴을 이용한 것이었다. 5월의 지저분한 굴 요리를 먹는 새엄마와 아버지를 조롱하는 듯한 연출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새엄마는 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하녀의 요리솜씨에 감탄하며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는다. 이후 경쾌한 클래식음악과 입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토하는 둘의 모습이 어우러지며 살인시도가 유쾌한 복수처럼 보이게 만든다. 서양 고전 명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심리적으로 억압받아 온 리지가 당돌한 하녀 브리짓을 만나 변화를 겪고, 마침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을 시각적·청각적으로 매혹적인 연출과 함께 보여준다. 실제 리지가 남긴 말들을 극 중에 삽입한 방식 또한 상징적이며, 시청자에게 인물과 사건을 새롭게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초반부에는 리지에 대한 연민을, 중반부에는 그녀의 돌변에서 비롯된 충격을, 후반부에는 재판에서 보여주는 뻔뻔함과 능청스러움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시청자의 감정을 끊임없이 흔들며 몰입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혹은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여성의 억압과 분노, 그리고 복수라는 서사를 극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실제 인물의 삶은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 예술적 각색은 창작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관객은 작품이 만들어 낸 허구를 역사적 사실과 구분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괴물: 리지 보든 이야기》는 여성의 복수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역사적 인물을 재현할 때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