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 코끼리만보×김미란, 연극 〈슬퍼할 시간이 없다〉
체홉 '세 자매'에서 출발한 창작극…부산의 장례식장으로
자신의 생일날 별거 중인 남편의 죽음을 맞은 어느 60대 여성과 가족들의 이상한 하루
극단 코끼리만보는 신작 연극 '슬퍼할 시간이 없다'를 오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서울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선보인다. 이번 작품은 김미란 연출과 극단 코끼리만보 단원들이 약 1년 여간 워크숍과 즉흥 등 공동탐색을 통해 창작한 공연이다. 김미란 연출은 연극 <영지> <맥베스>, <다른 부영> 등의 작품을 연출하였으며,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으로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수상한 바 있다.
보통의 작품은 작가나 연출가가 작품을 기획, 구상하고 그에 맞는 배우들을 섭외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배우로부터 출발했다. 이들이 모여 어떤 연극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방식이 좋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김미란 연출을 만났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재의 정육점을 배경으로 옮겨놓거나, 연극의 연습과정을 공유하는 등의 행보는 극단 코끼리만보가 지향해온 ‘공동탐색’과 ‘공동창작’이라는 목표와 걸맞았기 때문이다.
연출의 합류 후 공통의 관심사를 축출하고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키워드 중에서 ‘욕망’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나 세상은 이미 너무 뜨겁고, 요즘의 불안은 소리치기 보다 식탁 위의 말 한마다, 휴대폰 속 읽씹, 잠들지 못하는 밤으로 남기에 ‘욕망의 언어’보다 ‘침묵의 언어’로 말하는 것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지만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작품의 시작은 체홉이었지만 원작의 서사를 재현하거나 직접적으로 각색한 것은 아니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 자매'의 첫 장면에서 이리나의 명명일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그 시작이다. 김미란 연출은 “어느 60대 여성이 자신의 생일 날 남편의 부고를 듣는다면, 그 날은 앞으로 어떤 날로 기억될까?”하는 궁금증을 가졌고, 체홉과 장례문화 등을 바탕으로 배우들과 워크숍을 진행하며 새로운 인물과 상황을 발전시켰다.
'세 자매', '갈매기', '바냐 아저씨'에서 출발했던 인물들은 창작 과정을 거치며 원작에서 멀어졌고, 어느 새 부산의 한 장례식장에 모인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김미란은 이 과정을 체홉을 읽다가 잠들어 꾼 꿈에 비유한다.
창작 과정에서는 가족들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반드시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설정을 탐색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가족들이 뚜렷한 슬픔이나 원망 없이 장례식장에 모이자 오히려 예상치 못한 웃음과 서글픔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작품을 집필하고 워크숍을 주도해 온 김미란 연출가는 “워크숍을 통해 배우들의 즉흥과 개성에서 새로운 관계와 장면들을 발견하고, 배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인물들을 구체화한 만큼 배우 자신의 체험과 감각, 관찰이 인물에 묻어나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까? 모든 캐릭터들이 어딘가 낯설지 않고, 친근감이 든다. 김미란 연출은 관객들이 작품 속 인물 중 한 사람쯤은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극장을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슬퍼할 시간이 없다, 외로울 시간은 많다.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자신의 생일날 오랫동안 별거한 남편의 부고를 듣게 된 이일화와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장례식장에 모인 가족들은 정작 고인의 죽음보다 자신의 삶에 더 관심이 많다. 누군가는 이혼을 꿈꾸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서울로 떠나고 싶어 한다. 죽음이라는 중대한 사건 앞에서도 각자의 일상은 계속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는 않고, 같은 공간 속에 있지만 각자 다른 행동을 한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주변을 서성인다. 어쩌면 관객은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순간 속에서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일상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한 무대에서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감정과 욕망을 드러낸다.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도 좀처럼 서로의 마음에 닿지 못하는 모습은 작품의 부제인 '외로울 시간은 많다'와 맞닿아 있다.
생일 날 장례식장에 간 이일화 역은 이영주가 맡는다. 조성현, 최지혜, 이서도가 각각 자녀 박곤, 박미정, 박정 역으로 출연하며, 박정의 남편 병희 역에는 강연주와 이승혁이 더블캐스팅됐다. 문성복은 연극 연출가 위창주, 김은정은 고인의 연인 함금석, 백혜리는 장례식장 직원 해원 역을 맡는다.
공연은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열린다. 관람료는 전석 3만5천원이며, 놀티켓·티켓링크·플레이티켓에서 예매할 수 있다. (문의 0507-1410-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