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하는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포럼
“미약하지만 끈질긴 얼굴들을 기다립니다.” 2024년 첫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포럼 소개글에서 기록하는 활동가 황용운이 건넨 초대의 말이다. 전쟁과 군수산업, 우주산업의 군사화를 함께 들여다보자는 포럼 초대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한 사람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다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짧은 문장은 2026년 올해로 세 번째 가을을 맞는 영화제 포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초대처럼 읽힌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오는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화여자대학교 ECC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포럼이 열린다. 언론·정치·노동을 가로지르는 네 개의 포럼이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독립영화의 유통과 관객, 전쟁을 전하는 미디어, 보수·극우와 민주주의, 능력주의와 비정규 노동이 올해의 의제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의 삶을 시야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가.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묻는다는 것
2024년 첫 포럼에서 제기된 질문들은 고통받는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후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평화는 언제쯤 평화로울 수 있을까’. 전쟁과 국가 시스템이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돌아보고,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먼 나라의 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는 문제의식이었다.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바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의 일상을 파괴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그 시선은 한국 사회의 참사로 이어졌다. ‘참사와 국가’는 세월호와 이태원, 아리셀의 이름을 함께 놓고 반복되는 죽음과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과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이 다시 배제되는 현실도 의제에 담겼다. 기억한다는 말이 추모의 순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지켜주지 못했는지, 왜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지 끝내 묻지 않는다면, 기억은 또 다른 참사를 막는 힘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영화와 문학은 그 질문을 오래 붙드는 방식이었다. 그 주제의 포럼으로 ‘연대와 증언으로서 문학과 영화’는 개인의 경험과 증언이 기록될 때, 사회적으로 굳어진 기억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보고 듣는 사람 역시 증언에 참여하는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얼굴이 마음에 남는다면 그 얼굴을 쉽게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연대는 시작될 수 있다.
투쟁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지난해 2025년 제2회 포럼은 ‘자본 권력은 노동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물었다. 그 중심에는 한국와이퍼 노동자의 집단해고와 해고 반대 투쟁이 있었다. 포럼 소개글은 200명이 넘는 노동자의 해고, 200일이 넘는 노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연대투쟁, 그리고 사회적 고용기금 조성이라는 성과를 짚었다. 동시에 고용안정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자본의 행태가 남긴 상흔은 여전하다고 적었다.
일자리는 월급이 들어오는 통로의 역할을 넘어선다. 하루의 시간을 조직하고, 동료와 관계를 맺고, 내일을 계획하게 하는 삶의 자리다. 그렇기에 투쟁이 마무리됐다는 소식만으로 그 자리를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수는 없다. 합의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시간이 남는다. 사회적 고용기금이라는 성과가 품은 의미 역시 그 시간과 맞닿아 있다. 해고를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운으로 남겨두지 않고, 이후의 삶을 함께 책임질 방법을 찾았다는 점 때문이다.
이 자리에 다큐멘터리 〈뚜벅이〉의 김수목 감독과 최윤미 뚜벅이재단 상임이사, 전지윤 사회운동가가 참여자로 이름을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삶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같은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이 사회를 맡은 이 포럼은 자본이 남긴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폭력적 행태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영화 자체의 생존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해당 포럼은 ‘위기의 한국영화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를 통해 관객 감소와 영화산업의 문제, 작품의 완성도를 함께 의제로 삼았다. 삶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관객에게 닿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올해 개막포럼에서 독립영화와 플랫폼을 다루는 논의는 이 질문을 이어받는다.
더 많이 보는 시대, 우리는 더 깊이 이해하고 있을까
2026년 제3회 포럼을 여는 첫 질문은 ‘독립영화는 독립적인가: 극장과 플랫폼에서 만나는 독립영화’다. 23일 오후 8시에 열리는 개막포럼에서는 김청강 한양대 교수가 발제를 맡는다. 극장 중심 배급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독립영화가 플랫폼 시대의 관객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살펴본다. 작품을 만드는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이 누군가에게 다가갈 가능성이다. 영화가 품은 목소리가 관객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목소리는 어디에서 울릴 수 있을까. 첫 번째 포럼은 한국IPTV방송협회,인문콘텐츠학회와 공동주관한다.
다음 날 24일 오후 1시에는 두 번째 포럼인 ‘실시간 학살의 시대: 전쟁의 참상과 미디어 보도의 한계’가 이어진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발제하고, 초청작 〈The Descendant of Cable Street〉의 노아 미를라크감독과 언론인들이 토론에 참여한다. 전쟁의 참상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시대에 미디어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지 돌아보는 자리다.
많이 본다는 것이 반드시 깊이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참혹한 장면을 접하고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름과 사연, 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고통의 장면을 더 오래 바라보는 일만이 아닐 것이다. 그 고통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이해하고, 화면 속 사람을 우리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던 존재로 만나는 일이다. 2024년 첫 포럼이 던졌던 평화와 연대의 질문은 그렇게 미디어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당일 오후 3시 세 번째 포럼은 ‘우리 안의 보수와 극우 그리고 민주주의’다. 오찬호 작가이자 사회학자가 발제하고, 김누리 중앙대 명예교수와 김영식 전(前)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신부가 토론에 나선다. 한국 사회 내부의 보수·극우 정서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살펴보는 자리다. 제목의 ‘우리 안’이라는 말은 질문을 남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힘을 바깥에서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자리는 좁아지거나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영화제 마지막 날인 25일 오후 2시 50분에 진행되는 마지막 포럼에는 ‘공정은 누구를 배제하는가: 능력주의와 비정규 노동’이 관객을 기다린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이 발제를 맡고, 영화제 포럼 디렉터인 손정순 연구위원의 사회로 안민영 PD, 안은지 서일대 겸임교수, 임윤수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청년노동자지원팀장이 토론한다. 능력주의 담론의 이면에 가려진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공정은 누구나 바라는 가치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누군가의 불안정한 삶을 개인의 능력과 노력 탓으로 돌리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일하는 사람의 존엄을 평가와 경쟁의 결과에 맡겨도 되는가. 2025년 지난해 포럼이 일터를 빼앗긴 노동자의 상처를 바라봤다면, 올해는 그 상처를 정당화할 수도 있는 사회의 익숙한 언어를 돌아보게 한다. 두 번째 포럼부터 마지막 포럼까지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사단법인 시민언론 보루와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가 공동주최하고, 인문콘텐츠학회가 주관한다.
올해 3일간 열리는 포럼 의제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과 참사, 해고와 불안정 노동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지켜져야 할 삶이 있고, 충분히 들리지 못한 목소리가 있다. 영화가 현실을 비추고 포럼이 그 현실에 질문을 건넬 때, 관객은 스크린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영화 한 편과 토론 한 번으로 세상이 곧바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의 고통을 이전처럼 지나치지 않게 될 수는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말 앞에서 잠시 멈추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 곁에 설 수도 있다. 올해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의 가을 포럼이 초대하는 자리는 어쩌면 그런 작은 변화일 것이다.
영화가 끝나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미약하지만 끝내 서로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얼굴들이다.(손정순,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포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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