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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

2026년, 다시 보는 〈염쟁이 유씨〉

직접 등록 박명관

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

2026년, 다시 보는 〈염쟁이 유씨〉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의 손이 해야 할 일이 남는다.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마지막 모습을 정돈한 뒤 관에 모신다. 염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절차이지만, 그 일을 하는 쪽은 언제나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염쟁이 유씨〉는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을 무대 한가운데 세운다.


유씨는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에 관한 말을 늘어놓기에 이보다 적당한 인물도 없을 듯하지만, 정작 그가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산 사람들이다. 염을 하며 만난 이들과 죽음 앞에서 드러난 욕심과 후회, 떠난 사람을 대하는 남은 사람들의 태도가 그의 입을 통해 하나씩 무대로 돌아온다.


배우는 한 명이다. 그렇다고 무대까지 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유씨를 취재하는 기자가 나타나고 선친과 아들 상식, 조폭과 장사치가 한 배우의 몸을 빌려 차례로 등장한다. 별도의 배우가 들어오고 나가는 대신 한 사람 안에서 인물이 바뀌면서 장면도 함께 전환된다. 모노드라마에서 배우의 몸은 한 인물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여러 인물이 드나드는 무대가 된다.


배우 유순웅이 혼자 여러 인물을 맡는다는 사실만으로 이 공연의 특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염쟁이 유씨〉는 1인극이면서 마당극의 성격을 품고 있다. 배우가 무대 안에서 혼자 완결된 세계를 만드는 대신 객석에 말을 건네고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느 순간 관객은 망자의 자식이 되고 장례에 모인 사람이 된다. 조금 전까지 남의 죽음을 바라보던 사람이 그 죽음 안에 자리를 하나 얻는다.


죽음을 다루는 무대라고 해서 웃음이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욕심은 우스꽝스럽게 드러나고 유씨의 입담 사이로 해학이 스민다. 웃다가 죽음을 만나고, 죽음을 들여다보다 다시 웃는다. 장례의 엄숙함과 사람 사는 소란이 같은 무대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오래 남는 것은 죽음에 관한 말만이 아니다. 유씨가 평생 해온 일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염은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산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한다. 몸을 씻고 수의를 입혀 관에 모시는 데는 정해진 순서와 시간이 필요하다. 배우가 그 행위를 무대에 가져오면서 죽음은 관념에서 빠져나와 사람이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된다.

그 일을 해온 사람이 아들에게 말한다.


“상식아, 죽는다는 건 말이다. 생명이 끝나는 거지.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거든.”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는 할 일이 남는다. 그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함께 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린다. 염이 한 사람의 몸을 정돈하는 시간이라면 그 곁에 선 사람에게는 쉽게 정돈되지 않는 시간이 시작된다.


〈염쟁이 유씨〉가 처음 무대에 오른 뒤 20년이 넘었다. 그사이 죽음을 둘러싼 풍경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멀어지는 방식도 달라졌다.


휴대전화에는 오래 연락하지 않은 사람의 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만나지 않고도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고, 몇 년째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의 오늘을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진과 영상, 주고받은 문장과 계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이 많아진 시대다. 기록이 오래 남는 것과 관계가 오래 남는 것은 같은 일일까.


〈염쟁이 유씨〉의 염은 이 질문과 묘하게 마주 선다. 디지털 공간에는 한 사람의 흔적을 저장할 수 있지만 염을 하려면 한 사람의 몸 앞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 곁에 머물러 자신의 시간을 써야 한다. 몸과 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돌봄에는 저장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사회적 고립과 홀로 맞는 죽음이 개인만의 문제로 남지 않게 된 지금, 이 오래된 염쟁이의 노동도 달리 보인다.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닿는다. 20여 년 전의 작품이 오늘의 현실을 예견해서가 아니다. 현실이 달라지면서 같은 무대에서 이전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씨는 죽음 앞에 선 산 사람을 유심히 본다.


“한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거여. 가슴속에 안아 담느냐, 그냥 구경거리로 삼느냐.”


우리는 이제 하루에도 여러 사람의 죽음을 화면으로 만난다. 사고와 재난, 전쟁과 범죄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읽고 영상을 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한 번 움직여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모든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는 일과 그 죽음 곁에 있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는 남는다.

〈염쟁이 유씨〉는 그 차이를 객석에서 직접 건드린다. 관객을 극 안으로 불러 망자의 가족 자리에 세우면 구경하던 사람에게 역할 하나가 생긴다. 화면은 닫을 수 있고 페이지는 넘길 수 있지만,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배우와 마주한 관객은 잠시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오래된 마당극의 관객 참여가 여기서는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를 바꾸는 장치가 된다.


염이라는 노동도 지금 다시 눈에 들어온다. 속도와 효율을 생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시대에도 돌봄에는 쉽게 줄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의 마지막 몸을 정돈하는 일 역시 얼마나 빨리 끝냈느냐만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떠난 사람에게 일정한 시간과 절차를 내어주는 것, 유씨가 평생 반복해온 노동에는 그런 시간이 들어 있다.


죽음은 아직 자신의 일과 멀다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은 훨씬 일찍 찾아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옮기고 살던 곳을 떠나는 사이, 매일 만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짧은 통화 한 번으로 부모의 시간을 짐작하는 날도 생긴다.

연락처에는 남아 있는데 생활에서는 사라진 사람들.

유씨가 말하는 ‘관계’는 그런 이름들까지 돌아보게 한다.


“죽는 거 무서워하들 마시게. 잘 사는 게 더 힘들구 더 어려운 법이여.”


잘 사는 법이 무엇인지 유씨가 목록을 만들어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곁에서 산 사람들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 이 말을 남길 뿐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에도 대사는 무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관객은 객석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간다. 극장 밖에서 휴대전화를 켜면 밀린 메시지가 떠 있을 것이다. 들어오기 전과 같은 화면이고 같은 연락처다.

그중에는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사람의 이름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