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우리는 왜 자꾸 말을 시킬까
― 〈마음이 외치고 싶어 해〉가 보여준 침묵의 심리학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시절,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수업 중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고 사람과 눈도 잘 맞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솔직히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시험지를 받아보면 그런 생각이 흔들렸다. 답을 곧잘 썼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글로 묻고 글로 답하게 하면 의사 표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집에서의 모습은 또 달랐다. 학원에 요구할 것이 생기면 어머니를 통해 전달해 왔다. 이것을 해달라, 저것은 이렇게 해달라는 식으로 요구도 꽤 구체적이었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말하기 어려운 아이일 수도 있겠다고.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생겼다. 어느 여자 선생님과 아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그 선생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두 마디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선생님을 찾아가 그날 있었던 일이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특이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선택적 함구증(Selective Mutism)'이라는 개념을 접한 뒤, 나는 그 아이보다 먼저 당시의 내 판단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선택적 함구증은 단순한 수줍음이나 고집과는 다르다. 말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있으면서도 학교와 같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지속적으로 말하기 어려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미국정신의학회의 DSM-5부터 선택적 함구증은 불안장애로 분류되고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역시 선택적 함구증을 불안장애로 설명한다. 집이나 편안한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말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기를 거부하기로 선택한다기보다 말해야 한다는 기대 자체가 강한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만났던 아이가 시험지에는 답을 잘 썼다는 사실은 그래서 다른 의미로 읽힌다. 당시 나는 말을 하지 않는 모습에서 먼저 아이의 능력을 의심했다. 지금이라면 적어도 그렇게 빨리 판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그 아이가 선택적 함구증이었다고 지금 진단할 수는 없다. 당시 증상이 얼마나 지속됐는지,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다른 가능성도 검토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에 현재의 지식을 끼워 맞추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 경험은 질문 하나를 바꾸어 놓았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왜 그 침묵이 얼마나 어려운 상태인지를 살피기 전에 그 사람의 능력이나 태도부터 판단할까. "말해봐." "왜 말을 안 해?" "말을 해야 알지." 말하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요구이다. 그러나 불안 때문에 말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말하라는 요구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 선택적 함구증의 치료도 처음부터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도록 몰아붙이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말하기와 연결된 불안을 낮추고 비교적 편안한 조건에서 시작해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대와 상황을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방식이 활용된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에서 짧은 말, 대화로 조금씩 옮겨가는 방법도 있다. 목표가 의사소통의 확장이라고 해서 출발점까지 반드시 말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에도 서로 다른 이유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람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원인이 모두 선택적 함구증인 것은 아니다. 침묵이라는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진단할 수는 없다. 압도적인 사건을 겪은 뒤 말수가 급격히 줄거나 특정 경험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면 다른 심리적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DSM-5-TR에서도 선택적 함구증은 불안장애에 속하지만 PTSD와 급성 스트레스 장애는 별도의 '외상 및 스트레스 관련 장애'로 구분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라는 결과만 보고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이 언제 입을 여느냐만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어떤 조건에서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가. 이 질문을 조금 과장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말하면 누군가 다친다'라고 믿게 된 아이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2015년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 해>(心が叫びたがってるんだ。, The Anthem of the Heart)의 주인공 나루세 준은 말을 하지 못한다. 어린 준은 우연히 아버지의 비밀을 목격하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한다.
이후 부모가 헤어지고, 아버지는 가족이 깨진 책임을 어린 딸의 말에 돌린다. 어른의 관점에서는 부모 관계가 무너진 책임을 아이의 말에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준이 받아들인 사건의 인과관계는 단순하다. 내가 말했다. 부모가 헤어졌다. 내 말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준은 여기에서 하나의 규칙을 만들어낸다. 말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달걀의 저주'라는 동화적 장치로 보여준다. 준은 말을 하려고 하면 배가 아프다. 물론 이를 실제 선택적 함구증의 의학적 묘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이다. 준의 침묵에는 부모의 이혼과 죄책감이라는 강한 서사적 원인이 설정돼 있다. 현실의 정신질환을 영화 속 인물 하나에 그대로 대입해서도 안 된다.
대신 '달걀의 저주'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침묵의 규칙을 부과하는가. 말하지 않으면 실수하지 않는다. 거절당할 일도 줄어든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침묵은 한동안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 모든 관계에 적용될 때 생긴다.
준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말을 봉인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길도 막아버린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준의 변화가 누군가의 "이제 말해"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준에게 먼저 생기는 것은 노래이다.
말과 침묵 사이에 생긴 세 번째 길
준은 평범한 대화로는 꺼내기 어려웠던 것을 노래에 실으면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노래는 단순히 뮤지컬을 위한 극적 장치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직접 말하는 것과 완전히 침묵하는 것 사이에 하나의 통로를 만든다. 준에게 중요한 것은 갑자기 말을 잘하게 되는 일이 아니다. 말하지 못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가능한 표현 방식 하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물론 노래가 실제 심리치료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의 장치와 임상적 치료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다만 사람이 자신에게 가능한 방식에서 출발해 표현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접점이 있다. 실제 선택적 함구증을 다룰 때도 글쓰기나 몸짓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활용하고, 거기에서 점차 발화로 옮겨가는 방법이 사용된다. 우리는 대화를 인간관계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맞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러니 지금 당장 말해야 한다'는 요구는 같은 말이 아니다. 준에게 노래가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 대신 말해준 것도 아니고 침묵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니다. 준은 자신에게 가능한 다른 형식을 먼저 발견한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뒤 자신이 봉인해 두었던 말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 장면을 보며 오래전 학원에서 만났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에게 말을 시작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 선생님이 화를 내고 달랬다는 사실과 아이가 말을 시작했다는 사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 오히려 선택적 함구증에 대한 임상적 권고에서는 아이에게 말하도록 압박하는 것을 피하도록 한다. 내가 지금도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아이는 어느 날 모든 사람에게 말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더구나 공부에 필요한 대답만 한 것도 아니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려고 그 선생님을 찾아갔다. 말을 해야 해서 겨우 입을 연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적어도 내가 전해 들은 모습 속에서 아이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그 차이를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침묵의 반대편에있는 것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대개 침묵부터 없애려고 한다. 질문을 다시 하고 대답을 기다린다.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이유를 묻는다. 때로는 수줍음이라고 생각하고, 때로는 고집이라고 판단한다. 나 역시 한때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 아이의 능력부터 의심했다. 하지만 침묵이라는 행동 하나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는 없다. 불안 때문일 수도 있다. 두려움이나 죄책감과 얽혀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끝내 알 수 없는 이유일 수도 있다. 오래전 나는 그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왜 말을 안 하지?" 지금이라면 질문이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이 사람에게 지금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질문 앞에서는 말 이외의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시험지에 적은 답. 고개를 끄덕이는 것. 누군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말. 그리고 어느 날 한 사람을 찾아가 늘어놓기 시작한 별것 아닌 이야기들. 〈마음이 외치고 싶어 해〉에서 준의 마음은 침묵하는 동안에도 사라진 적이 없다. 말보다 노래가 먼저 나왔을 뿐이다. 오래전 그 아이에게도 말보다 먼저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안다. 그때 내가 먼저 물었어야 했던 것은 왜 말하지 않느냐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어떤 방식이라면 자신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