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위장한 무언가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공포심을 조장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이 꽤나 충격적인 소재는 현대에도 렙틸리언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인간들의 뇌를 자극하고 있다. 2024년,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기생수: 더 그레이'라는 드라마는 기다란 촉수를 뻗듯 연속 흥행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원작 만화 ‘기생수(1988)’의 시퀄인 이 작품은 스토리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선언이라도 하듯 ‘더 그레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작중 기생수를 살포하는 팀인 그레이팀에서 따온 것인데, 그레이는 흔히 회색이라는 뜻이다.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을 섞으면 나타나고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검은색은 어둠을, 흰색은 빛을 말하기에 회색은 그 중간 지점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을 기생수로부터 지켜내는 그레이팀이 흰색이 아닌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관점의 차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기생수팀은 구원과도 같지만, 그건 동족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지구에게는 다르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생략)…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해당 작품의 오프닝 멘트다. 원작과 동일한 이 멘트는 해당 작품이 원작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치다. 인간 비판.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인간이 주제이며, 그렇다면 기생수라는 제목 또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되려 지구에게는 인간이 기생수이지 않은가?’ 지구에게는 인간이 되려 어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가능성이다. 인간이 어둠이 될 수 있으며, 기생수도 빛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연상호 감독은 이를 분명히 하는데, 그 근거가 바로 주인공인 정수인(전소니 역)이자 기생수의 편에 선 강원석(김인권 역)이다. 정수인은 기생수와 단순한 공존을 넘어 교감하기 시작하고 강원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생수의 편에 선다. 그리고 그레이팀의 팀장인 최준경(이정현 역)은 마침내 기생수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양면성은 연상호 감독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의 전작들인 ‘부산행’, ‘반도’, ‘괴물’ 등에서도 쓰인 바 있으며, 인간성을 잘 다루는 그에게는 안성맞춤일 테다. 등장인물의 반전을 보여주며, 끝내 한 줄기의 희망을 비추는 플롯은 그의 인간을 믿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사실 이는 대부분의 일본 판타지 만화와도 흡사한 형식이며, 그렇기에 본작에서 연상호의 능력이 더욱 비치는 셈이기도 하다. 그는 기생수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변화하는 설강우 (구교환 역)를 통해 작품의 메시지를 툭툭, 그러나 심도있게 던진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만화에서도 대부분 쓰인 장면인지라, 너무 클리셰적이거나 답습하는 듯 느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클리셰를 잘 이용할 줄 알아 되려 신선하게 와닿을 때도 있다. 가령 강원석(김인권 역)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마치 기생수에게 살해당할 듯 딸과의 애틋한 통화 신을 넣은 것이 대표적이다. 빛과 어둠 중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는 주제를 내포하는 작품인 만큼 반전이 스토리에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이처럼 기생수와 인간의 공존이라는 기존의 주제를 적극 활용한 본작은 원작 ‘기생수 (1988)’가 왜 사랑 받았는지를 다시 알려준다. 바디 스내처 장르의 원조 격인 소설 ‘거기 누구냐? (1938)'와 영화 ‘더 씽 (1982)’ 에서 영감을 얻은 ‘기생수 (1988)’는 기존에 없던 ‘공존’이라는 설정을 새로이 보인 덕에 당시 큰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비록 본작은 주제에 접근하는 데에 부실한 과정이 다소 보이긴 했으나, 이것이 1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의 회생을 기대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보다 기생수라는 가상의 생명체로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가 맛보기 수준이라 아쉬울 뿐이다. 여기서 아쉽다는 표현은 애가 탄다는 말과도 같다. 자의가 아닌 타인에 의해 태어난 기생수는 인간과 달라 보이지만 피차일반인데, 감독 또한 유사성을 알고 있어 인간 비판에서 인간 구원이라는 대주제로 넘어가, 시사하려는 노력이 엿보였기에 그렇다.
의도적으로 남긴 숙제라는 이미지를 지우기 어려우며, 시즌 2의 주목도가 자연스레 높아진다. 연상호 감독, 그의 인간관에 다시 귀기울여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