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 내에는 다채로운 글을 쓰는 수많은 필진이 있는데,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유독 글쓴이가 궁금해지는 글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내게 이승주 에디터는 아트인사이트 필진들 중에서 가장 먼저 궁금해졌던 이였다. 그러나 이따금 그의 글 속에서 만나게 되는 비상한 표현력에서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고, 티타임 신청을 다음으로 미뤘더랬다. 이후 몇 차례의 아트인사이트 단체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이승주 에디터와 안면을 텄고, 그의 성격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제 진득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 넣은 티타임 제의를, 그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좋아요. 저도 성은 씨가 궁금했어요.” 이런 설레는(?) 말과 함께.
사실 그는 현재 아트인사이트에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본래는 실명 기고를 하다가 200편 쯤부터 필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공개된 장소에 이렇게 많은 글을 올리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비단 필명 선택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의 글 안에서 그런 마음이 종종 드러나곤 한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어하게 된 계기는 복잡한 상징 체계를 심리학적 지식으로 풀이하고 자기 경험을 그 해석과 함께 녹여낸 칼럼이었다. 그런 칼럼 연재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돌연 자기 글의 ‘의도 없음’을 성토하며 분서갱유 장면을 묘사한 옛 그림을 도판으로 첨부했다. 이는 자기 글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독자로서 든 생각은, ‘아니, 이렇게 장편인 글을 잘 써 놓고?’일 따름이었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지만 불특정다수가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올리는 건 부끄러워하는 편인가? 이미 수백 편의 글을 이름을 걸고 올렸는데도 그 부끄러움이란 쉽게 무뎌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필명으로 기고자 명을 바꿀지언정 ‘계속해서’ 글을 쓰고 올리는 원동력은 무엇인 걸까? 그에게 글과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두 사람의 접근성을 고려해 강남역 근처에서 우리는 만났고, 식사를 한 후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카페로 이동했다. 난 그에게 주로 쓰는 글의 소재와 글을 쓸 때의 태도, 혹은 글을 쓰며 자기 글에 대해 드는 생각 등을 질문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 중의 일부분이었다.
“사실 어떤 문화콘텐츠건 그냥 저한테 글은 뭔가 나의 즐거움을 영구적인 방법으로 보존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저의 글쓰기의 기능이 '보존'에 가깝다보니, 좋은 점 나쁜 점 다 포함해서 조금도 새나가지 않게 완전히 방부 처리하는 거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왜 자기 글을 감추고 싶어해요? 어느 정도 대화의 어색함이 풀리고 나서, 그가 첨부한 분서갱유 도판 등을 떠올린 내가 묻자 승주 에디터는 한창 글을 쓰다가 글에서 자기 자신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면’ 거부감이 생긴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제 글이 소중하지만 본격적으로 읽히는건 좀 쑥스러운 것 같아요. 제 글이 일종의 어떤 즐거움을 집약해서 보관해 놓는 통조림 같은 거라면, 열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어려운 일이다. 글에는 쓰는 사람의 특성이 자연스레 묻어나니까. 나 역시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글을 지우고 싶은 마음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세상도 나도 변하는데 예전 가치관이나 표현이 담긴 글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거기 그대로 자기 자신인 채로 있으니 그 존재감이 미리부터 두려웠던 탓이다. 여기에 승주 에디터는 글쓰기의 기능을 보존으로, 자기 글을 자신이 느낀 즐거움을 집약해 놓은 통조림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방면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나 부담감이 더 크지 않았을까.
헌데 하필 통조림이라니. 승주 에디터는 내 이상 속의 취미-이상적인 집을 갖고 나면 100% 수행하고 싶은 취미-가 펜트리에 보존식품들을 차곡차곡 모아두고 잘 관리하며 뿌듯하게 들여다보고 야금야금 꺼내먹기인 건 몰랐으리라. 나는 승주 에디터의 글들을 내 내면 세계 속 펜트리에 넣고, 불투명한 통조림 캔을 두드려 소리를 들어보고, 캔을 땄다. 그러다 이 통조림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궁금해진 것이다.
승주 에디터의 통조림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그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답을 아끼는 편이었다. 글을 쓰고 올리고 나면 보통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티타임 제의를 수락할 때 해 준 말은 빈 말이 아니어서, 그도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돌이켜 보면 질문의 수가 거의 비등비등했던 것 같다. 인터뷰는 어느새 대화로 바뀌어 있었다. 연배가 비슷했던지라 서로에게 익숙한 화제가 떠오를 때면 우리는 잠시 추억여행에 빠지기도 했다. 서로 좋아하는 작품을 영업하기도 했다. 굳이 이 대화가 여전히 인터뷰임을 고집한다면 서로의 글에 대한 ‘쌍방 인터뷰’ 정도로 부를 수 있을 테다. 내가 그의 글과 글 쓰는 태도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그 역시 내 글에 대해 알아갔고, 그의 질문에 답하며 나는 덕분에 내 글의 특성까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우리 둘은 문체나 글 쓰는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르다. 승주 에디터가 보기에 내 글은 자연을 자주 소재로 삼고, 단어를 고르고 골라 예쁘게 다듬은 글이며, 글 한 편 안에서 특유의 흐름이 있고 완결성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글이다. 장인이 공예품에 들이는 시간과 세밀한 노력을 좋아하는 것 만큼 나도 내 문장을 제련하고 열심히 사포질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알아봐주니 신기하고 기뻤다.
한편 나는 승주 에디터가 쓴 글 속의 기발하고 과감한 표현을 좋아한다. ‘이런 단어들을 조합해서 갑자기 이런 문장을…? 하지만 무슨 뜻인지 너무 알겠어.’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문장이 글에서 종종 튀어나오려고 하는데, 글 쓴 당사자는 민망해하지만 난 그의 글 속 표현 몇 개를 외웠다. 그 정도로 참신했고 내가 못 만들 문장임을 알기 때문이다.
서로의 글에서 받은 인상을 나누고 상대에게서 실제로 글쓰기 과정이 어떠한지 이야기를 들으며 일종의 확인 과정을 거칠 무렵이었다. 승주 에디터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글의 기능-분리와 보존 -에 대해 재고하기도 했다.
“근데 이야기하면 할수록 (제 글쓰기에) 분리의 기능만 있는건 아닌거 같아요. 글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글을 오로지 하나의 기능으로만 쓰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렇다. 쓰는 일이 쓰는 삶이 된다면 쓰는 사람이 글에 보태는 정성은 물론이고 글이 그 사람에게 보여주는 세상도 점점 더 다층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정말 보존만을 원한다면 굳이 누군가 읽을 수 있는 장소에 쓸 필요도 없겠네요. 누군가에게 노출되길 원하지 않지만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발견되길 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근데 또 읽히길 원하지 않는 기분도 있었죠. 그래서 갑자기 (글에서) 와장창 했던것 같아. 이건 의미없습니다!! 읽지 마십쇼!!! 탁자를 뒤엎는 것처럼(웃음).”
자기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을 인정하다가도 승주 에디터는 곧 다시 ‘쓰고 올리는’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모순적인 마음을 내비쳤다. 다행히(?) 아트인사이트에는 글 삭제 기능이 없어 그의 고민 중에 지워진 글도 없었다. 나 역시 시간이 지나고나서도 그의 글을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내 호기심을 신기해 했는데, 내 얘기를 듣다가 그 호기심의 이유를 나의 ‘발굴하려는 본능’에 있다고 말하며 나를 분석했다. 그는 나처럼 ‘oo사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서 발굴하는 사람의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의 글을 발굴했다기 보다는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대에 함께 글을 쓰는 ‘동료 필진’의 글을 감히 ‘발굴’했다고 말하기에는 얼토당토 않은 일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승주 에디터가 직접 받은 인상이 ‘발굴하려는 본능’이었다면 나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 본다. 나는 고고학자가 되어 직접 유물을 발굴하고 다니거나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오래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인 ‘지적 전통’이라는 뿌리를 따라내려가는 일은 매우 즐거워한다. 누군가의 글에서 뿌리를 따라내려가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필자의 ‘쓰는 마음’과 ‘쓰는 이유’, ‘쓰는 삶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즐거움일 거라고. 그런 의미의 발굴이라면 승주 에디터가 말하는, 안 보이게 감추고 싶지만 소수의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라는 ‘가장 내밀한 무언가’를 내가 조금이나마 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가장 내밀한 무언가를 이해해주길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의 마음속 내밀함 중 하나로 타로카드의 ‘은둔자 카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은둔자 카드를 ‘나만의 카드’라고 여기며 한동안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 은둔자(The Hermit)가 서 있는 빙판 위에는 은둔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생명이 없어 고독하고 고요하다. 그는 내면 세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 번잡한 세상을 뒤로 한 이로, 어찌 보면 고독을 선택한 자다. 검정과 흰색 사이의 회색 로브는 은둔자의 중간자적 의미를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램프와 지팡이는 은둔자의 상징물이다. 빛을 발하는 램프는 그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상기시킨다.
은둔자는 내게도 너무 익숙한 존재다. 졸업논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림 속에 은둔자 도상이 있었다. 대학원 생활을 접으며 한동안 그 그림을 덮어두고 살려고 했는데, 반은 진심으로 반은 심심풀이로 보게 된 유튜브 타로 채널에서 은둔자 그림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구 그림의 일부였던 은둔자는 여기서 작은 화폭 하나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있었고, 나의 성향을 말해주는 카드로 뽑혀 나왔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지만 타로 유튜버는 이 카드가 내적 성찰을 상징한다고 얘기했고, 이 카드를 뽑은 사람은 창작자나 심리상담가에 어울린다는 말 등을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한동안 이 은둔자 카드를 내 카드라고 생각하곤 했다.
정작 은둔자 카드에 대한 승주 에디터의 글은 인터뷰 후기 글을 쓰기 위해 그의 글 목록을 다시 돌아보다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내가 승주 에디터의 글에 반응하게 된 이유가 이 카드 때문일 수도 있겠다. ‘쓰는 사람의 내밀한 무언가’ 중 하나가 남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나는 자신을 드러낼 카드로 은둔자 카드를 뽑는 사람들이었다.
인터뷰 이후 이어진 카톡 대화 중에 나는 승주 에디터에게 나도 은둔자 카드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글에 쓴 것처럼 자세히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 후기 글을 읽게 될 그의 반응이 살짝 궁금하다. 생각보다 그는 쿨하게 지나갈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1차 완성하고 나면 검수를 한 차례 부탁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검수는 안 할래요. 나는 오해도 가치 있다고 생각해~.” 아, 쿨하다.
나와 승주 에디터는 여러모로 매우 다르지만 쓰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쓰는 사람으로서 실컷 글을 완성하고 나서 기고를 망설이는 마음, 어떤 글은 눈 질끈 감고서라도 올리는 마음, 그렇게 해서 사실은 내 내밀한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발견 이후의 연결까지를 꿈꾸곤 하는데 이렇게 인터뷰 티타임을 수락해 준 것을 보면 그도 연결을 피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듯하다. 비록 글을 쓰다 자기 자신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면 탁자를 뒤엎고 싶어하는 그이지만, 그는 결국 글을 올리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은둔자 카드를 고르는 어른들은 아늑한 옷장 안에 들어가는 아이처럼 자기 몸에 꼭 맞는 고독의 세계에 들어가곤 한다. 그곳은 고독의 세계지만 ‘내 몸에 꼭 맞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곳에는 여분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옷장 안이 좁아서 혼자 있지만 혼자인 느낌이 들지 않듯이. 그러나 은둔자 카드를 고른 데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고독의 세계를 팽창시키는 게 취미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조차 곧잘 없애버린다. 사유의 옷장 밖으로 나온 그들의 손에는 팽창시켜둔 세계의 조각이 들려 있다. 그것을 오래 바라보며 하나 혹은 여러 편의 글을 쓴다.
나와 승주 에디터 말고도 많은 ‘쓰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오늘도 글을 쓰고 올려서 누군가가 나의 내밀한 무언가를 알아주길 바라고, 타인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수많은 글 사이에서 유영하며 내 마음과 같아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그러니까 여러분, 글에 담긴 자기 모습이 선명한 만큼, 공들여 쓴 글이 소중한 만큼, 탁자를 엎고 싶은 마음이 비례할 때도 있겠지만 부디 그 탁자를 엎지 말아주세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당신과 같은 수많은 ‘쓰는 사람들’의 글이 필요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