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대사회에서 읽는 '굴뚝'
<굴뚝을 기다리며>의 '고도'의 '굴뚝'으로의 변형은 현대사회의 핵심을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찬가지로, 약간은 이성적인 '누누'와 신발 때문에 불편한 '나나'가 등장한다. 이들은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면서 인간 청소부, 청소 로봇, 굴뚝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유튜버를 차례대로 만난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결국 이 곳에 '누누'만이 남는다.
두 작품의 주된 변형은 굴뚝으로의 변형, 비교적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들이 담겨있는 인물들과의 조우, 나나와의 이별이라 할 수 있다. 나나와의 이별(사실, 누누의 전반적인 반응들에서 라이터의 관점이 묻어나온다)은 개인적으로 작가적인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이라서 따로 미뤄서 설명하고, 좀 더 비인간적이고 차가워진 무경계해진 '굴뚝으로의 변형'과 이러한 변형을 강요한 사회 속에서 좀 더 비극적으로 연출된 '다른 인물들' 을 먼저 기술해보려 한다.
우선, 굴뚝으로의 변형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좋든 나쁘든, 의도했든 아니든, 누군가의 해석과 의도로 인한 것이든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는 우리의 아버지 신이 떠오를 정도로 인격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굴뚝은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으며, 움직일 것이라 기대되지도 않고 애당초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으로 존재한다. 장소이자 물건인 그것은, 인간인 고도와 다른 질감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변형이 현대사회의 중요한 맥락을 짚는다고 본다. 베게트가 글을 쓰던 시대와 비교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경계는 (말 그대로) 자비 없이 흔들리고 있다. 실증주의가 신앙의 자리를 대체하던 시절이 차라리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을 정도로, 과학과 기술이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 시대에 고정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ai는 인간의 노동도, 창의성도 강탈해가지 않았는가. 데이터와 확률은 불확실하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간이 오랜 역사 동안 지켜왔던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공간이 기술로 압축되고, 노동이 대체되면서, 인류는 전례 없는 정신적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도, 시공간의 제약도, 어떤 고정된 실존조차도 잃어버린 인간은 이제 어디에 서 있게 된 걸까?
우리의 정신은 이제 과학으로도, 기술로도 묶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유와 절망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자신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건으로 표상되는 자본이, 배경이자 갈구의 대상이 된다. 우리 사회를 들끓고 공유하는 판타지는 많은 부분에 자본이 기여하고 있다. 인간적인 느낌이 남아있던 고도가, 굴뚝이 된 것은 이러한 맥락 덕분일 것이다.
그러한 굴뚝을 기다리는 일이니,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도 좀 더시대적 현실보다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했던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더 뚜렷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방문자인 청소부는 굴뚝에 매달린 자다. 그는 누누와 나나가 '밥줄'이라 농담하는 밧줄을 온몸에 휘감고 많은 굴뚝을 청소하면서 푼돈을 받는다. '굴뚝'이상의 '굴뚝'을 보기 위해 생활을 포기하고 시답지 않은 기다림을 계속하는 누누와 나나와 달리, 그는 이 거대한 굴뚝을 생계로서, 자신의 삶으로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에 더러운 손으로 도시락을 까먹고, 누누와 나나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소박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청소부는 사랑스럽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청소 로봇이다. 그는 인간 청소부를 대체한다. 더러운 옷을 입고 밧줄을 동여맨 인간과 다르게 깔끔한 옷에 과장된 치장을 하고, 밧줄도 동여매지 않았다. 밧줄을 감지 않은 그에게 굴뚝은 그냥 처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굴뚝에서 기다리는 누누와 나나를 적대시하지 않지만, 누누와 나나가 키우는 식물과 꽃과 마찬가지로 정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식물과 꽃이 어떤 순환체계를 만들고 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누누와 나나는 자신들의 오줌을 양분 삼아서 그것들을 키우고, 다 큰 것들을 취한다. 더러워 보이지만,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곳에서 피어난 꽃은 이 창백한 연극에서 순수한 생명의 위치를 점한다. 누누와 나나가 잉태해낸 순수한 존재다. 애당초 이 생물의 부산물을 이 연극에서는 오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누누의 자살 협박을 통해서만 물러난다. 그조차도 법적인 절차로 해석된다. 어쨌든 청소부 로봇의 등장은 어렴풋이, 로봇이 인간을 대체했음을 암시한다.
등장인물들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냉소는, 마지막 소녀의 등장으로 비극성이 강조된다. 소녀는 굴뚝이라는 배경의 세트장 밖에서 관객들을 의식하며 움직인다. '갓생을 사는' 모드라는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 인터넷의 요정 같다. 누누와 나나는 그녀가 공중에 떠있음에 경악하며 굴뚝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서 얼떨떨해한다. 그녀 역시 굴뚝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물며 그 자신조차도 분열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도의 소년과 다르게, 그녀는 공허함을 남기고 공중에서 나타나 공중에서 사라진다.
작가적 메시지에서 좀 더 보강하여 설명하겠지만, 소녀가 간 후 밝았던 조명은 아주 깊은 곳처럼 급격히 어두워진다. 어두운 곳에서, 나나는 희망을 잃고 누누의 곁을 떠난다. 누누는 어둡고 추운 곳,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마지막 '밥줄'을 잘라버리고 갓생사는 소녀의 몸짓을 의식처럼 따라한다. 초라한 텐트로 누누가 들어가면서 막이 내린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