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가볍게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꼭 듣는 노래들이 몇 곡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얼마 전에 발매된 (여자)아이들의 신곡 '퀸카(Queencard)'다. 경쾌한 멜로디와 가사, 입에 착 붙는 후크는 잠에 취한 몸과 정신을 깨우며 하루를 시작하기에 딱 알맞아서 요즘 가장 먼저 재생을 누르게 되는 곡이다.
사실 발매 첫 날 이 곡을 듣고서는 약간 의아한 감상이 남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편견과 대상화에 대한 묵직한 일침을 날린 'Nxde',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저 나일 뿐이라는 선언을 담은 'Tomboy' 등 (여자)아이들의 최근 발매 곡들을 보면 곡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내용에서 꽤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번 신곡은 짧아진 곡 길이, 하이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뮤직비디오, 가볍고 반복적인 가사 등 전체적으로 힘을 많이 뺀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실제로 프로듀싱을 맡았던 멤버 전소연은 이전 곡들에 비해 비교적 가볍고 코믹한 포인트를 넣고자 했으니 가볍게 즐겨주면 좋겠다는 제작 의도를 밝힌 바가 있다. 하지만 후반부의 가사를 보면 마냥 의미없이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마르거나, 살찌거나, 아무거나 걸치거나. 곡이 말하는 퀸카는 곧 겉모습이 어떻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취한 채, 나는 모두가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퀸카라며 몇 번이고 얘기하는 유쾌한 곡. 곡에 꽉꽉 채워 담긴 당당한 자신감이 재생과 함께 몸 구석구석 퍼지며 괜히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3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쏟아지는 밉지 않은 자아도취를 복잡한 생각 없이 즐기다보면, 마음이 맑게 개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가벼움에 호불호가 많이 갈린 것도 사실이다. 곡을 두고 오가는 설전을 쭉 훑어봤다. 어떤 모습이든 자신감이 관건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으로 꾸민 채 무대에 오르는 것은 모순적이라는 지적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내가 최고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이 곡의 강력한 에너지는 그런 한계로 상쇄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력함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피어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곡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 영화, '아이 필 프리티'(2018)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이 필 프리티
에이미 슈머 주연의 미국 코미디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유쾌한 성격과 센스를 가졌지만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르네의 이야기를 담았다. 모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동경하던 르네는, 운동을 하다 머리를 다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건 바로 사고 이후, 자신의 모습이 평소에 동경하던 아름다운 여자들의 모습처럼 바뀐 것.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르네는 상상 속에서만 이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실현해 나간다. 꿈만 꾸던 본사 프런트직에 입성하며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가고,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운명같은 사랑을 이어가는 르네의 환상같은 나날.
하지만 또 한 번의 사고로 마법은 풀려버리고 만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절망과 함께 르네는 연인 이선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렇게 고대하던 프레젠테이션 자리에도 불참한다. 자신이 이룬 것들은 모두 바뀐 외모 덕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는 아름다운 외모가 사라졌으니 그로 인한 성취들도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르네가 겪은 마법같은 변화는 처음부터 르네 눈에만 보이던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르네는 언제나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포스터 속 'Change everything Without changing anything'이라는 문구처럼, 겉으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르네의 당당함이 주변과 세상을 매료시키며 르네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정말 바뀐 것은, 외모로 의기소침해 하던 르네의 태도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르네는, 모두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린 소녀일 땐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넘치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의심하게 돼요. 누군가 중요한 것들을 규정해주고 그 울타리에서 자라죠. 그리고 수도 없이 자신을 의심하다가 결국은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려요. 갖고 있던 자존감과 믿음까지 모두. 그런 순간들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것보다 강했다면 어땠을까요? 누군가 우리에게 부족하다면서 마르거나 예쁘다고 하지 않을 때, 우리가 현명하게 난 그것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왜냐면 나란 사람은 바로 나니까요! 이게 나예요. 나로 사는 게 자랑스러워요! 우린 아름다워요!
우리는 그저 자기자신일 뿐이며 겉모습과 관계없이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영화의 메세지를 가장 응축시켜놓은 이 마지막 연설 장면. 그렇게 마침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르네의 모습처럼, 결국 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그가 가장 그다울 때였다.
때론 단순함이 필요하다
사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참신한 설정이지만 또 어찌 보면 전개가 모두 예상되는 뻔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도식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화를 재생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승전결을 얼추 다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우연한 계기로 해결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이, 그런 콤플렉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한다. 탄탄대로를 걷듯 흘러가는 생활,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은 채 원래의 인연들을 소홀히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쌓아왔던 것들을 잃을 위기에 놓인다. 주인공은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깨닫고, 눈 앞의 위기를 극복하며 한층 성장한 채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런 식의 스토리 라인은 평범한 주인공이 환골탈태하는 식의 하이틴 영화에서 지겨울 정도로 봐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숱한 이야기들과 '아이 필 프리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건 바로 영화 내내 우리는 르네의 모습이 르네의 눈에 어떻게 바뀌어보이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르네는 그저 르네일 뿐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르네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어간 연인 이선처럼, 관객은 당당한 행보를 이어가는 르네만의 매력에 매료되어 간다. 분명 모습은 바뀌지 않았는데, 르네는 점점 빛나 보인다.
만일 르네의 외적인 변화가 드러났다면, 영화는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와는 달리 어떤 것이 더 '프리티'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의 기준을 답습하고 강화하는 일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르네의 외모가 아닌 태도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독특한 설정은, 르네의 외모를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르네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265 사이즈의 신발을 신는 르네. 유쾌한 언변과 센스를 가진 르네. 처음의 르네가 자신의 모든 것이 외모로 설명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르네의 르네다움을 이루는 것들은 아주 다양했다.
물론 전개의 개연성이나 현실성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자존감 하나로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르네의 변화는 그녀의 세심함과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르네의 당당함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든지, 무책임하게 모습을 감춰버린 르네가 멋진 연설 하나로 모든 것을 이해받는다든지, 주인공에게 우호적이고 원활하기만 한 전개는 말 그대로 영화이니 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외모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는 한편으론 너무 단순한 것도 같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르네가 자신의 외모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새로운 행보를 걷기 시작했던 건, 어쩌면 우리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복잡한 현실이니 세상의 섭리니 하는 것들을 모른 체하고 머리를 비워야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의 비유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자신감 같더라도, 내 존재 그대로를 세상에 강력히 주장하는 일에는 그런 단순함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우리를 재단하려 드는 세상이다.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조소를 내가 먼저 나서서 마주하기보단, 조금 웃음이 나도 스스로 되뇌어 보는 건 어떨까. 모두에게 사랑받는 퀸카처럼, 나는 내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