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마다 떠오르는 심상이 있습니다. 바로 글을 쓸때마다 자동으로 동그라미 모양으로 글이 모아지는 상상입니다. 시작하는 단어와 끝 문장이 맞닿을 때 저의 망상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동그란 원은 하나의 세계로 모아집니다. 글에 빼곡하게 박혀있는 어리석은 생각,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드는 망상들은 동그란 원 밖을 나가지 않습니다. 문장의 첫 단어와 문장의 끝인 . 가 닿는 순간, 한심하게 쏟아지는 구멍에 마개가 끼워집니다.
이전 연재물에서 언급했듯, 저는 저의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서 대단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글에서 비쳐보이는 자의식의 부산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교육 과제라는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판타지와 그로인해 드러나는 무지와 순수함이 뷔페처럼 전시되어 있거든요. 저는 그래서 글을 씀으로서 나를 드러내보내기 보다, 하나로 수축되어 사라지길 바랍니다. 말하자면 지금 제가 써내려가는 이 글자들과 거기에 박힌 상념은 하나하나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셈입니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새로운 생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시절 저는 의무와 책임을 어딘가 던져놓고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이세계 환생을 위해서 이세계 트럭도 필요없었습니다. 타블렛과 풍부한 망상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좌우간 제가 뱉어낸 글자나 선이 만들어낸 또다른 세계는 최악의 만족감을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대충 비슷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림이 존나 싫다". 물론 지금이랑 같은 의미입니다. 10년이 지나도 이런걸 보면 이런 습관도 영영 버릴 수 없는가 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서 어쩌란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주 합당한 생각입니다. 저는 경멸을 전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생각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동그랗게 그려진 자의식에 찬 거울은 여전히 혐오스럽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어리석은 세계를 견고한 성인 것마냥 지키면서 사는 것은 경멸할 일까지만은 아닌듯 합니다.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극단 산울림에서 올린 작품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최근 산울림은 헤밍웨이의 삶을 건조하게 다룬 작품을 올렸습니다. 자칫하면 헤밍웨이의 모순적 삶을 고발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음에도, 극단은 '노인과 바다'와 엮음으로써 헤밍웨이의 삶과 예술에 대한 판단을 관객들의 손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삶을 함께 곁들여 읽는 '노인과 바다'는 정말 새로웠습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등장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삶이라는 지루한 지옥과 맞서싸우는 성실하고 강한 인간이지만, 정작 헤밍웨이 본인은 그러한 남성상에 얽매여 신경증으로 고통받고 자살하고 마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산티아고는 연약한 헤밍웨이가 뒤집어썼던 강한 남성의 가죽이었습니다.
저한테 이 연극은 정말 여러 감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헤밍웨이가 지향했던 삶의 가치와, 그렇지 못한 작가 본인의 괴리가 저의 삶에서도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입니다. 노인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시지프스가 떠오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지만, 어딘가 씁쓸한 점이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고통을 긍정하는 것과, 내 몸을 좀먹고 있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다르지는 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헤밍웨이의 삶을 일부 이해한 후 읽은 산티아고의 이야기는 이전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으로 산티아고 노인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삶의 고통에 맞서는 투우사인 동시에 늙고 지친 노인이며, 자연과 동화되길 바라며 소년의 순수한 애정을 그리워하는 노인이었습니다. 바다에는 현실에서 그가 닿길 바랬던 삶의 이상적인 영역과 그의 깊은 곳에서 억압되어 있던 감수성이 너울거립니다.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환상이나 세계는 경멸스럽습니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는 그의 삶의 범위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는데도, 그는 여러 경험들로 인해 그것이 전부라고 믿게 됩니다. 소명이나 신념이라는 미명 아래에 한 사람의 무지와 착각이 들끓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환상이나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는 그의 세계의 약간 밖에 있습니다. 그가 결코 경험할 수 없지만, 그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그곳에 있습니다. 백일몽과 환상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 세계 아래에는 그만의 감수성과 갈망이 들끓습니다.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셈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리의 가장 미성숙한 부분이 가장 성숙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 착각으로 만들어진 성이 그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최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떠올린 시점에서 [TAROTEA]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순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