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체성 중심에는 하나의 선이나 균열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것은 결핍의 구조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뇌에 연결된 척추를 중심으로 신체가 구성되고 그 몸이 다시 세계를 움직이듯, 그 균열은 아름다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나는 그 의미의 척수를 뽑아 실체를 상상하는 행위를 내 인생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노동이라 여겼다. 부단히 그 척추의 마디를 매만지며 그의 삶을 재구성했다. 그의 팔이 이토록 길기에 타인의 얼굴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고, 우심실이 유독 두꺼웠기에 사랑에 서툴렀을 것이라고. 그가 온몸을 뻗어 이루려고 했던 세계는 자신이 구축한 신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를 해체하는 일이다. 내가 정성스레 쓰다듬던 척추의 마디들은 사실 타인을 내 입맛대로 요리하기 위해 박아 넣은 고정핀에 불과했다. 그가 사랑에 서툴렀을 것이라 단언하는 순간, 그의 살아있는 우심실은 내 문장 속에서 박제가 되어 박동을 멈췄다.
척추를 뽑아낸 순간, 몸 안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점멸한다. 그 순간 세계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정지된 표본이 된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믿어왔으나, 사실 해부되어 차갑게 식은 시체를 사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담기 위해 바구니를 짠다. '버킷 리스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된 그 다섯 글자는, 삶의 파편들을 담을 수 있는 구조로 치환한다. 담을 수 있는 꿈이라니, 지독히 낭만적인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나는 굳이 이 주제를 끌고 와 그 모순을 비웃는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세계를 구조로 치환하고, 그 안의 균열을 유일한 진실인 양 뽑아내어 전시한다. 바구니를 보며 그 안에 무언가 담기보다 그 틈새를 찾아 탈주할 궁리만 한다.
하지만 낭만적 자본주의를 비웃는 내 쪽이 훨씬 더 꼴불견이다. 탈주를 꿈꾸는 행위조차 결국 '바구니'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탈주는 자유가 아니라 구조의 반작용일 뿐이다. 의지할 대상이 없어 똑같이 바구니를 떠올리고, 그 바구니를 비틀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다니, 구조에 기생한 다음 의미를 포식하고 경련하는 나야말로 기생적 위선자다. 조롱은 주체성의 증명이 아니라 이 구조에 철저하게 종속되어있다는 반증에 불과하다.
시체, 혹은 바구니가 된 나를 본다. 지독한 자기애의 망상이었다. 바구니가 환상인 것처럼 시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단한 지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던 나 자신도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저 일상을 견디기 위해 세계를 학대하고 분석해온 결과물일 뿐, 자기연민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초라한 것들이다.
나는 그 시체, 혹은 바구니에서 기어나오는 구더기를 본다. 촘촘하게 짜여진 직조물의 틈을 발견해 빠져 나온 그 구더기는 해가 저무는 신년의 하늘을 한번 돌아보더니, 나에게 말을 건다. '저는 정직해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직해지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그 구더기에게 한 마디 쏘아 붙인다. 정직해지고 싶다는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시체를 파먹다가 깜빡 놓고 간 도덕적 우월감은 잘 챙기셨나? '저는 정직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정직함이라,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망상이다. 불가능한 기표를 붙잡고 관중 없는 곳에서 고결한 선언이라도 할 셈인가.
이제 내 앞에는 시체도, 구더기도, 내 얼굴도 없는 텅 빈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다. 나는 그 바구니에 말 하나를 접어 넣는다.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담는 꿈이라, 다시 봐도 정말 병신같이 낭만적인 자본주의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