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첫 번째 굳이


 

이 책을 잘 읽어 보려고 <밤으로의 긴 여로>를 먼저 읽었다. 두 권을 다 읽고 나니 굳이 읽을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애초에 문학이란 게 예술이란 게 다 굳이 굳이 태어난 것들 아닌가.


굳이 읽지 않아도 되었을 만큼 작품이 별로라는 의미의 ‘굳이’는 죽어도 아니다. 유진 오닐의 그 희곡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소설의 감상에는 차이가 없었으리라는 의미의 ‘굳이’다. 내가 두 작품 다 얕게밖에 읽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fin_표1.jpg

‘희곡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는 작가의 말 때문일까, <밤으로의 긴 여로> 바로 다음에 이 책을 읽어서일까. 이 글이 희곡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버렸다. 재밌게도 나 같은 상상을 극 안의, 아니 이야기 안의 캐릭터도 한다. 소설 초반에 배우인 등장인물이 연극을 마친 뒤 관객들의 반응을 희곡 형식으로 상상하는 장면이 있다.

 

 

오늘 공연 어땠어? 2막에서 제이미가 대사를 씹더라. 우태인의 제임스도 괜찮았지? 술 취한 건 연기 같지 않더라. (일동 웃음) 그러게. 진짜 한잔한 것 같기도? 그나저나 메리는 역시 최기옥이야. (의아한 얼굴로) 에이, 최기옥 전성기는 지났지. (...) (속삭이듯) 근데, 최기옥 진짜 약쟁이 같지 않아? 뭔가 불길하지 않아? 역시 좀…… 그렇지 않아? (p.12)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쓰고 나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부부를 연기하는 배우 ‘기옥’과 ‘태인’, 그리고 그 둘의 매니저 ‘윤주’와 ‘상호’. 도입부의 주인공을 기옥이 맡았기에 처음에는 그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파트를 읽을 때는 윤주에게 시선이 갔다. 그때는 중년의 톱 배우인 기옥보다 윤주라는 소시민 캐릭터에 내가 이입하기 쉬워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윤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때는 또 상호가 보인다. 상호의 이야기에서는 태인을 보고, 태인의 이야기에서는… 딱히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kyle-head-p6rNTdAPbuk-unsplash.jpg

 

 

 

두 번째 굳이


 

굳이 따져보자면 그가 맡은 배역, 제임스가 보인달까.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제임스. 태인과 제임스는 둘 다 술을 많이 마시고, 가족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태인은 제임스에 몰입하는지, 연극 뒤풀이에서도 제임스를 곧잘 흉내 낸다. 기옥 또한 그렇다. 태인의 술주정을 받아치기 위해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덩달아 메리를 연기하는 기옥은 메리처럼 약물에 의존한다. 이 둘은 자신의 치부를 닮은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을 민망해하거나 수치스러워하기보다는, 즐길만한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였더라, 유명하지만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어떤 작가의 책을 읽고,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은 결국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의 초반에서, 관객의 반응을 그려보던 기옥의 공상은 멀리멀리 뻗어나간다.


 

여기에서 꽈당 넘어진다면.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조명이 켜진다면. 마침, 넘어진 바닥에 못이 튀어나와 있는 거지. (...)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웅덩이가 생기고, 관객들은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환호와 비명은 다른 거구나 생각하며 피 냄새를 맡으며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무대 위에서 죽고 싶었어요. 이렇게는 아니었지만, 이라고 말할 힘도 없이.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으로 끊임없이 회자될 나의 죽음. (p.12-13)

 

 

나의 불행함을 무대 위로 올려버리면 어쩐지 견딜만한 그 끝이 해피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냥 새드하고 배드한 끝에도 메리배드엔딩 따위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유진 오닐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본인과 그 가족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써버린 걸까? 그래서 메리도, 아니 기옥도. 제임스도, 아니 태인도.

 

 

 

세 번째 굳이


 

본인들은 질색하겠지만 굳이 짚어보자면 기옥과 태인은 서로를 싫어하는 듯함에도 꽤 여러 구석에서 닮았다. 실은 윤주도, 상호도, 서로서로. 결국은 모두 타인 안의 자기자신을 찾아 열심히 들여다보고 가련히 여길 뿐이다. 이걸 아는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둔 태인뿐이었고, 그래서 태인의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 나는 광대가 되어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그것은 내게 어렵지 않은 일. 마지막 관객이 객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상호야 오해하지 마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니. 나는 창에 비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살이 타는 냄새. 검은 연기 속 어둠과 폐허. 내 눈이 이 모든 피날레를 담도록 내버려두기로 하고 나는 퇴장한다. 박제된 광대로서, 커튼콜이 없는 세계로. 박수도, 야유도 없이, 가족도, 신도 없이…… 암전. (p.143)

 

 

네 인물 중에서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것은 결국 태인인 듯하다. 그냥 태인은 아니고 죽음 앞의 그 태인만.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을 마주한 것이 그 태인. 가장 마음이 편해 보이는 것도 그 태인이다. 마음이 편한 것과 행복이 동의어는 아니다마는. 다른 인물들이 태인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지 않는 이유에는 애초에 그들이 태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그 결말이 부러웠기 때문이라는 감상…... (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암전.

 

 

 

image.pn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