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 이름은 김그린입니다.
1.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쓰기에 너무 가볍고 또 어떤 때에는 쓰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돌이켜보면 말로는 입 밖으로 사랑한다는 문장을 꺼내어 발음해 본 적이 없고, 글로는 어쩐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재한 문장이야말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아 줄곧 사랑 이외의 표현을 찾아 헤매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을 이렇게 쓰고 이렇게 빌었더랬죠.
온 세상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길. 세상 모든 순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길.
소망은 결핍을 거꾸로 쓴 것이라고 해도 좋을까요. 저는 세상의 모든 순간이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정하길 바랐습니다. 세상이 제게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았으니까요.
2.
명사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언제나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없이 넓고 끝없이 깊어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양 같은 사람. 마음에 크고 작은 풍랑이 일 때면 이따금씩 스스로를 향해 되뇌어 보곤 했습니다. 작은 대양아, 너는 이 정도 일에 흔들려서는 안 돼.
또한 저는 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드높고 무거운 태산 같은 사람. 스스로를 대양이며 태산이라 말하기엔 아직 망설임이 있지만, 지금의 저는 어쩌면 적어도 바다와 산 같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3.
형용사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시원한 사람입니다. 성정도 태도도 사고방식도 생활습관도 취향도 모두 그러합니다. 시원하다는 말은 여러 동의어로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 깔끔함. 정련됨. 그리고 초연함. 앞선 두 가지는 생득적 자질이되 마지막 한 가지는 후천적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본의치 않게 얻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건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았던 세상’의 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4.
살면서 남에게 내보일 글을 써야 하는 순간마다 ‘삶’에 관한 비유를 수도 없이 들곤 했습니다.
묻는 사람이 없음에도 글을 쓰는 지금은 삶이 그저 한 폭의 커다란 점묘화 같습니다. 살다 보면 좋아하는 색으로 점을 찍을 수 있는 순간이 있고, 뭐 그런 대로 봐줄 만한 색의 점을 찍는 때가 있고, 어떤 순간에는 싫어하는 색의 오점이 찍히게 되고. 분명 한 번에 점 하나씩만 찍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씩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벌써 이만큼이나 칠해져 있었던가 싶고, 칠할 때는 몰랐는데 저기가 원래 저런 색이었나 싶고, 점들이 한데 모이면 이렇게 전혀 다른 색으로 보였던가 싶고.
제가 바라보는 스스로의 그림은 퍽 나쁘지 않게 느껴지지만, 이따금씩 그 그림이 못 견딜 만큼 비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음 앞쪽으로 내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마음 저 뒤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 내 삶은 사실 의도로부터 벗어난 수많은 편차들로 얼룩덜룩하다는 생각을. 내가 그린 밑그림에 맞추어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었던 점들은 한 줌에 불과하고, 제멋대로 찍힌 점들은 셀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좁은 의미에서의 운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견해야 다르겠지만 저는 운이 좋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5를 가지고도 5 이상을 얻는 것.’
5를 가지고 5를 얻는 것이 상식인 세상에서, 5를 가지고 10을 거뜬히 얻어내는 것이 행운이라면, 저는 10을 가지고 있다 해도 언제나 그것이 잘 쳐 줘야 7쯤으로 돌아오는 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굵직한 관문들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를 해도 열 번 중에 일곱 번은 지고 들어가는 운. 그러니 언제나 노력은 배로, 점검도 배로, 대안도 배로, 기대는 절반으로.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인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좋아합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세계로 나뉘는 것이며, 선택의 기로에서 우주는 갈라진다고 말하는 이론을요. 나의 10이 5가 되어 돌아오던 매 순간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갈라졌을 나의 수많은 다른 우주와 그 우주의 나를 떠올렸습니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은 그 애들이 가고 있을 테니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10을 5로 되돌려받는 내가 여기 있으니 다른 수많은 우주들 중 어딘가의 나는 5를 10으로 되돌려받기도 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럼 그 수많은 우주들 중에서 바로 지금 이 우주의 저는 단연코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죠. 수많은 우주를 일렬로 줄세웠을 때 적어도 중간. 아니면 더 어중간한 뒤쪽의 우주. 10을 가지고 있다 해도 언제나 그것이 5로, 아무리 잘 쳐 줘야 7쯤으로 돌아오는 우주.
5.
10이 7로 돌아오고 7이 5로 돌아오는 우주에서 한평생을 살다 보면 초연함이라는 미덕을 자연스레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초연함이라는 단어는 꿈이라는 단어와 양립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함께 느끼게도 됩니다. 달을 향해 쏘면 빗나가도 별이 될 것이라느니, 꿈을 크게 가지면 깨져도 그 조각이 크다느니-. 아름다운 말들이고 한때는 진정으로 감명을 받았던 말들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10을 얻으려면 15라는 꿈을 가져야 할 판인데, 손에 10은 고사하고 7조차 쥐어진 적이 없다면 꿈을 가지려 마음먹는 일조차 어렵게 되니까요.
수많은 꿈을 꾸었고 또 수많은 꿈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포기가 되지 않아 아득바득 살아남아 지켜지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되고 싶고, 앞으로도 줄곧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누군가 제 글을 보며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마음 저려하고 또 벅차올라하기를, 제 손끝에서 태어난 세상과 그 속의 인물들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낙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안온한 도피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 왔습니다. 모든 것이 한데 얽히고설켜 휘몰아쳐도, 소용돌이가 지나간 자리에 종국에는 따뜻함이 남는 결말로 끝을 맺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6.
수많은 ‘나의 우주’들을 일렬로 줄세운다 쳤을 때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는 단연코 첫 번째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찰나만큼은 다른 우주가 결코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반짝이는 순간들이 몇 있습니다. 나의 우주가 웬만한 다른 우주들에 비견해도 밀리지 않고, 어쩌면 가장 행복한 축에 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요.
학교 근처 바닷가에 놓인 통나무에 걸터앉아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장엄한 노을을 보았던 때. 수면에 별이 떠 있는 인적 드문 밴쿠버의 해안가에서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오래된 팝송을 따라 부르며 마시멜로를 구워 먹었을 때. 중학생 시절 체육대회를 하루 앞두고 친구들과 기숙사 한 방에 모여 옹기종기 잠을 청했을 때. 숲 속에 있는 만에서 카약에 홀로 몸을 싣고 물결을 따라 떠다니며 ‘그린 슬리브스'의 멜로디를 흥얼거렸을 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호숫가 옆에 놓인 트램펄린 위에서 한참을 뛰어놀다 뒤로 드러누워 저 멀리 움직이는 구름과 비행기를 구경했을 때. 몽골에서 한밤중에 게르를 빠져나와 무작정 돗자리 위에 몸을 누이고 은하수일지 아닐지 모를 희뿌연 것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았을 때. 오로라를 보러 향했던 북쪽 마을에서, 온몸을 꽁꽁 싸맨 채로 흔적도 없는 오로라를 마냥 기다리며 친구들과 밤새 코코아를 홀짝였을 때.
그러니까, 비록 오로라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고 사진을 찍어야 한 조각이 겨우 보일 듯 말 듯했지만. 잔뜩 기대했던 은하수는 결국 은하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허여멀건 별들의 잔상 같았지만. 5라기엔 많고 10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6 내지는 7 언저리의 애매함이 내 삶의 전반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순간들을 더없이 사랑했습니다. 다른 우주 어디에도 없을 오직 이 우주의 나만이 지니고 있을 순간들을요.
7.
나를 조금이라도 스쳐간 다정들을 모두 기록해 두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다정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니까요.
밴쿠버 섬을 여행하던 도중 계획 없이 발을 들인 한 공원. 누가 봐도 바다 건너편에서 온 여행자인 것이 분명한 우리를 위해 오래된 초록색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신 할아버지. 그렇게 잔디밭에 앉아 노래를 듣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다가오셔서는, 작고 둥근 돌 위에 직접 그린 그림을 건네 주신 또 다른 할아버지. 그 돌 위에 적혀 있던 “Be Fabulous”라는 문구.
밴쿠버 공립 도서관의 한국어 서가에 놓인 책 한 권. 그 책 안에 어느 여행자가 끼워 놓은, 이 책을 읽을 다른 이들을 향해 남긴 따뜻한 쪽지. 그리고 그 최초의 쪽지 뒤를 이어 여러 사람이 남긴 쪽지들. 발신인도 수신인도 특정하지 않은 수많은 담백한 글자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를 향해 건네는 맹목적인 다정들.
마음이 끝없이 끝없이 아래로 침잠해서, 남의 대학 캠퍼스 한복판을 하릴없이 걷다가 벤치에 주저앉았던 어느 오후.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로 기대어 앉아 있던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무어라 말을 걸려다, 하려던 말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옷이 참 예뻐요.’ 라고 말해 준 이름 모를 학생.
손을 많이 탄 초록색 기타를 연주하던 할아버지는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제가 할아버지의 노래를 종종 떠올려 보곤 한다는 사실을 모르시겠죠. 밴쿠버 공립 도서관의 한국어 책 속에 처음 쪽지를 남겼던 여행자는 제가 그 서가 앞에 멈춰서서 한참 동안이나 그 쪽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읽고 또 읽었다는 사실을 모를 테죠. 생면부지의 타인에게서 수심을 읽어내고는 대뜸 옷이 예쁘다는 말을 건네 준 학생은 그가 바닥 없는 우울에서 저를 잠시나마 건져올려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죠.
가끔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빚지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은 다정들은 분명히 사람을 살리더군요.
8.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깔끔하고 세련되며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더불어 정겹고 소박하며 온기가 느껴지는 것들도 좋아합니다.
서사의 흡입력과 깊이를 모두 갖춘 영화를 좋아합니다. 피상적이고 난해한 체하며 관객을 배제시키지 않고도 세련된 방식으로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를테면 <헤어질 결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 역시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는 모네와 쿠르베를 가장 좋아합니다. 북미의 여러 미술관을 돌며 마음에 들어차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여럿 만났지만 이름을 일일이 떠올리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번역된 해외 문학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서사의 흥미로움과 주제의식의 깊이를 모두 놓지 않는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시녀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파이 이야기>,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가장 아낍니다.
높게 솟아 있는 침엽수들을 좋아합니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들을 좋아합니다. 필름을 인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진들을 좋아합니다. 딱딱한 의자와 사진을 찍기 좋게 생긴 소품들로 이루어진 카페보다, 어르신들이 느릿한 속도로 음료를 만들어 주시는 조용한 카페를 더 좋아합니다. 밤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여행을 떠나기를 좋아합니다. 눌러 쓴 손글씨와 빛 바랜 엽서를 좋아합니다. 종종 마주칠 수 있는 길거리의 음악가들을 좋아합니다. 덤덤한 외국 유머를 좋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취향도 조금씩 달라질지 모르지만 골자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9.
반대로 싫어하는 것에 관해서도 떠올려 봅니다. 아무런 조정을 가하지 않았을 때 유튜브 추천 영상, 인스타그램 탐색 탭,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에 자동으로 뜨는 부류의 것들을 싫어합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정신 사나운 색의 자막, 보는 이의 관심을 끌고자 혈안이 된 콘텐츠들을 싫어합니다. 불특정 다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얄팍하게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싫어합니다. 빠르게 생겨났다가 금세 사그라드는 ‘트렌드’를 싫어합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간판들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을 싫어합니다.
10.
북미를 여행하며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며 사찰을 방문할 때마다 늘 같은 내용으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것들, 제가 사랑할 만한 것들로 제 세상을 가득 채워 주세요. 제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들, 제가 백 년이 지나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것들은 제 세상에서 거두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영영 제 곁을 떠나 버리는 일이 없게끔 해 주세요. 언젠가는 제가 제 삶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사람들의 염원이 모이는 신성한 장소에서라면 항상 가리지 않고 이렇게 간절히 빌었습니다. 스스로 누구에게 비는지조차 잘 알지 못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쓰기에 너무 가볍고 또 어떤 때에는 쓰기에 너무 무겁습니다만, 북미의 성당과 아시아의 사찰을 돌며 했던 무수한 이 기도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고 꼭 맞는 느낌입니다. 저는 원컨대 정말로 제 삶을 사랑하고 싶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