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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클래식 = 졸음의 품위?


 

오랜 시간을 견뎌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예술에는 그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지속적인 연대를 타고 소위 시간의 품위가 깃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에게 클래식 음악은-아주 유감스럽게도-내가 이십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광고나 영상 콘텐츠가 제시하는 특정 상황에 쓰이는 적절한 음악 정도로 각인되었으며, 어쩌다 클래식 연주회에 가서도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던 부분만 지나면 혼곤해진다는 사실을 거듭하면서 익숙함과 졸음의 품위를 선사하는 지루한 예술이 되었다. 집중해 보려고 해도 어느새 흐름을 놓치면서 혼란이 찾아오고, 거기에 졸음이 완벽하게, 마치 침대에 살포시 누워 이불을 덮는 것처럼 포개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왜 그럴까, 자문하고 자문하며 잠에 빠져들어 갔다.


최근 깨우친 사실 하나가 있는데 예술은 언어와 같다는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혼란을 가중시키고 집중을 흐트러뜨리며 졸음과 무관심, 더더욱이 부정적인 감정까지 안겨줄 수 있다. 낯선 예술에 무가치함, 무용함이란 평가가 덧씌워지기 십상이듯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나의 막돼먹은 평가는 사실 소통에 게을렀던 내 책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책임의 몫을 약간 덜어보자면 예술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과 예술과 소통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 차원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상대는 이미 최선을 다해 신호를 보내오고 있는데 나 스스로가 귀를 닫고 눈을 감아 수신을 거부하는 거에 가까웠다. 최근 다양한 공연과 영화, 문학작품을 접하다 문득 예술은 저마다 언어를 갖고 있고 그 언어가 이끌어갈 새로운 경지(적어도 새로운 경험)가 내 감각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런 반성을 하게 됐다.


물론 예술에도 보편성이 있어 언어의 장벽을 넘어 흘러들기도 하지만, 그 흘러드는 것에 내 언어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건 흘러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즉 수신의 의지가 있어야 소통이 성립하고, 적절한 향유가 있어야 그 예술이 나에게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소통에 실패했던 예술, 지루함의 품위로 기억되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학교 교양수업으로 클래식 강의를 수강하며 클래식의 역사를 비롯해 클래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던 현시점, 나는 과감히 이번 공연을 보러 가기로, 가서 진짜 제대로 감상해 보기로 결심했다.

 

 

[빈체로] 포스터_앨런 길버트_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jpg


 

이번 공연의 연주자인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도 처음 들어보고, 지휘자 ‘앨런 길버트’도, 바이올린 협연자 ‘조슈아 벨’도 모두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었다. 공연 작품의 작곡가 ‘브람스’나 ‘드보르작’은 들어본 이름이긴 하나 오늘 공연되는 그들의 작품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무지에 가까운 상태, 옹알이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으나 나는 외려 그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다. 익숙함과 상세한 지식에 기대지 않고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학교 교양 수업에서 배운 건 일반적인 단어 몇 개에 그치지만(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 악장 등등) 그조차도 호기심 가득한 아이가 한 단어만 가지고도 배시시 웃고 되새기듯이 놀라워하며 곱씹었던 나에겐 오늘 공연을 제대로 수신해 볼 수 있게 하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언어에 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안나 클라인 - 요동치는 바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옛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은 이 곡처럼 지금도 만들어지는 클래식 음악들이 있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작곡가 안나 클라인의 생년을 보자마자(1980년 생이다) 기대가 차올랐다.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_1 (c) Thomas Kierok.jpg


 

연주자들의 긴박한 발구르기로 시작돼 깜짝 놀랐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연주자가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발구르기가 있다는 걸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럿이 동시에 발을 구르니 무언가 무섭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 울림이 제목과 엮여 위풍당당하게 바다를 가르는 배를 연상시켰다. 거기에 연주자들의 반복적인 합창과 바이올린 활이 현을 튕기 듯하며 내는 소리, 무거운 색감을 연상시키는 금관악기들의 묵직한 소리와 드럼의 창창하면서 잘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덧입혀지는데, 마치 바다가 요동치는 위태로움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듯했다. 이후엔 바다의 일렁임을 건너다보듯 천천히 연주가 계속되며, 그 와중에 드럼이 긴장을 끌고 간다. 그러다 일순간 장대한 바다가 드러나고 큰 파도가 밀려오듯 다시 인상적인 주제 선율을 맞이한다. 그렇게 긴박감을 더하고 더하다 모두 단번에 일어나 기합을 넣듯이 절도 있게 마무리되어서 멋있었다. 평균 삼사십 분 되는 클래식 음악과는 다르게 오 분 정도의 짧은 음악이었지만 공연의 서두로서 강한 인상을 주었다. 현대적인 클래식 음악이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곡이 미국 흑인 여성 시인이자 인권 운동가 ‘오드리 로드’의 시 ‘여성은 말한다’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고 프로그램 북에 적혀 있었는데, 머물지 않고 자매와 마녀들을 찾아 나서는 시적 화자의 선언이 요동치는 바다의 원초적인 움직임과 얽히면서 여성들의 주체성이 생생한 이미지로 와닿았다. 예술에 의해서 빚어진 예술을 보는 듯했다.



 

브람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1악장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였는데, 오케스트라가 이어지다 바이올린 솔로(조슈아 벨)가 그 분위기를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가듯이 등장해선 꽤 긴 연주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휘청이다가 비극으로 미끄러지게 했다. 조슈아 벨의 연주는 활이 현을 길게 끄는 움직임과 바이올린 울림통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인해 비통함을 연상시켰다. 2악장은 ‘아다지오’로 비통하던 전과는 다르게 곡의 진행도 느려지고 바이올린 솔로도 느려지고 부드러워지면서 애절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마지막 3악장은 ‘알레그로 지오코소, 마 논 트로포 비바체’로, 빠르고 경쾌함이 주되면서도 잠깐씩 비통한 분위기로 계속 전환되어서 긴장하면서 연주를 듣게 했다.

 

 

조슈아 벨_2 (c) Shervin Lainez.jpg


 

40분 조금 안 되는 연주 시간 내내 관객들을 향한 채 일어서서 바이올린을 붙잡고 연주하는 조슈아 벨의 집중력과 악보 따윈 볼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협주라는 게 경쟁과 협력을 상징한다고 수업 때 배웠는데 정말이지 바이올린 솔로에서 오케스트라한테 연주 권한이 넘어가는 순간에는 경쟁 같이 느껴졌고, 반복되는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바이올린에서 동시에 나오는 순간에는 협력 같이 느껴져 신기했다. 사실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 내에도 있다 보니 바이올린 솔로와 오케스트라 간 협연이 가능한가, 바이올린 솔로가 오케스트라를 넘어 무대를 장악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의문이 들었는데, 작곡가 브람스의 치열함과 협연자인 조슈아 벨의 격정적이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연주 덕에 의문이 싹 사라졌다. 이래서 이런 곡이 존재하는 거구나, 나는 생각했다.


여러 악장을 가진 이 작품을 들으면서 몇 가지 클래식 에티켓을 알게 되었다. 악장과 악장 사이, 페이지 넘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소리가 멎는데 그때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악장이 마무리될 때 박수 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의 그 짧은 틈에 사람들은 저마다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연주를 집중해서 들으려는 의지와 연주를 듣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져서 우리가 같이 듣고 있구나, 실감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마지막 악장까지 끝나고 쏟아지는 박수 세례를 받으며 지휘자와 협연자가 대기실로 들어가지만, 박수 소리가 끊기지 않자 그들이 두세 번 다시 나와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재밌었다. 그러다가 조슈아 벨이 바이올린을 딱 들어 홀로 연주하는 순간은 굉장히 신선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곡은 ‘외젠 이자이’의 바이올린 소나타 d단조 Op.27 3번 “발라드”였다. 앵콜곡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던 터라 주의 깊게 듣기만 했는데 거의 십분 가까이 이어져 놀랐고 역시나 훌륭한 테크닉이 느껴지는 곡이라서 기량이 엄청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생각했다.


인터미션 때 프로그램 북을 꼼꼼히 살펴보며 1부에서 연주된 바이올린 협주곡이 브람스가 남긴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사실과 이 곡의 탄생 배경에 걸쳐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의 예술적인 우정을 알게 돼서 곡에 작곡가의 헌신뿐더러 애정과 삶까지 담겨있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드보르작 - 교향곡 7번 d단조, Op.70, B.141


 

앞선 연주를 들으면서 가졌던 몰입감을 공연 끝까지 가져가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작은 상상들을 덧대보았다. 짧으면 2분, 길어도 5분이 채 안 되는 길이, 갖가지 악기와 전자음, 개성 강한 보컬들로 이루어진 곡을 언제든지 귀에 꽂아 들을 수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클래식은 길고, 예측이 어려우며 대부분 가사 없이 진행되기에 따분하고 지루할 수 있겠지만, 이 음악들이 만들어지던 당시 사람들에겐 얼마나 놀랍고 생생했을까 상상하면서 보기로. 우리가 얼마나 지금 현실에 익숙한가를 생각하며 거리를 두고 보기로.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겠지만, 이 마지막 곡, 드보르작의 교향곡 7번은 음량 자체가 끝 모르듯 커지고 웅장해지는 데다 다이내믹한 부분들이 많아 압도되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단원이 늘었다 보니 음량 자체가 크다. 부드럽게 흐느끼는 듯한 현악기들의 무리가 배경을 드리우면, 팀파니, 트렘펫, 호른 등의 악기들이 배경에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그들은 그렇게 캐릭터성을 드러내다가도 긴장감이 너무 고양되어 곧 있으면 깨질 것같이 위태로워지면 점진적으로 완화하면서 곡의 집중을 계속 가져간다. 이렇듯 각각의 소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유연한데, 어느 순간에는 세기가 엄청나져서 심장까지 떨리게 한다. 이런 순간에도 지루하고 졸리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심장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이 곡은 이 곡에 대해 무지한 나 같은 관객조차도 손쉽게 그 매력에 끌어들인다.

 

 

앨런 길버트_2 (c)Marco-Broggreve.jpg

 

 

지휘자 앨런 길버트의 지휘 모습도 주목해서 보았다. 마치 마법봉으로 마법을 부리듯 이쪽 악기들에 힘을 주었다가 저쪽 악기에 힘을 주고 이쪽과 저쪽의 균형을 살피면서 세기를 약하게 하고, 그러다 다시 힘을 불어넣어 요동치게 하고 휘청이게 하고 광포하게 곡을 전진시키는 모습이 음악을 시각화, 의인화한 듯했다. 카리스마도 카리스마지만, 단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최대한 가까이서 단원과 눈 마주치며 지휘하는 모습에선 배려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카리스마가 강인함보다 부드러움에서 진가를 보인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아무래도 오케스트라다 보니 전체적으로 조망하듯이 볼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상체의 격정적인 움직임, 분주하게 음을 짚는 손가락과 우아하게 활을 잡고 현 위를 미끄러졌다 올라가는 손, 곡에 이끌리듯이 오르내리고 밀고 당기는 팔, 활기를 불어넣듯 관악기에 숨을 불어넣는 연주자들의 부푼 두 뺨. 몰입을 놓치지 않는 두 눈. 연주자들에게 기꺼이 음을 내어주는 악기들의 소리까지 맞물려 오케스트라가 살아 숨 쉰다. 음악이라는 바람이 불어와 천천히 흔들리는 듯한 들판 같았다. 서로의 악보를 넘겨주는 모습, 자신의 연주에 몰입하면서도 같은 악기 단원들을 의식하며 함께 연주하는 모습, 쉬어가는 타이밍과 들어가는 타이밍을 제때 알고 행동하는 정석적인 모습에서는 내공과 긴밀한 유대가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곡을 마무리하며 손을 멈춘 지휘자의 보고선 열렬히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교향곡의 품격이 이런 거구나 절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나온 박수였다. 이 곡은 계속해서 듣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이때도 어김없이 앵콜곡이 연주되었는데, 흔히 들었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었다. 익숙한 곡이었지만 모든 예정된 연주가 끝나고 앵콜곡으로 연주되는 거다 보니 여유와 즐거움, 만족감이 다 느껴져서 새로운 기분으로 기꺼이 귀기울여 들었다.


 


예술은 감각의 여행


 

NDR 엘프필하모니 오케스트라_3 (c) Thomas Kierok.jpg


 

예전엔 그저 음악을 듣고 듣기만 했으나 오늘은 다양한 상상을 하며, 악기들을 바라보고, 지휘자를 관찰하고, 조화를 생각하면서 연주를 감상하니 그전에는 못 느꼈던 것들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처음으로 나에게 제대로 수신된 것 같다. 언어가 트일 때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무언가를 이해했고 표현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분. 그런 기분은 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내가 느꼈던 감각들이, 수신했던 언어들이 자연스레 되살아나서 나를 내가 모르는 어느 곳으로 점점 더 이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감각의 여행이고, 그건 어느 예술이건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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