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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무엇으로 존재할까. 사랑으로 묶인 혈연의 구조일까, 아니면 부딪히며 균열을 일으키는 생의 도면일까. 희곡 <매달린 집>은 이러한 물음을 ‘집’이라는 공간 위에 세워둔다.

 

퀘벡 출신 작가 미셸 트랑블레가 집필한 <매달린 집>은퀘벡의 외딴 집을 배경으로 하여 세대에 걸친 가족의 삶을 그려내는 군상극이다. 희곡은 사회적인 인식과 충돌하는 개인들의 아픔을 그려냄과 동시에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모습 또한 비춰낸다.

 

이는 2024년, 경기도극단을 통해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약 1주일 간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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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집>은 캐나다 퀘벡의 오두막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한 가계도에 포함된 세 가족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분리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동일한 공간 위에서 움직이며, 각자의 이야기는 서서히 하나의 줄기로 맞물린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세대를 초월한 정서적 연결의 매개로 작용하면서, 극은 가족이라는 구조 자체가 품고 있는 숙명적 굴레를 드러낸다.

 

극 내 인물들은 군무처럼 서로의 동선과 대사를 교차하며 개인들이 형성하는 집단, 그리고 집단 속에서 부딪히는 개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석양이 진 후 별이 쏟아지는 숲 속의 오두막, 인물들이 경탄의 시선을 보내는 순간에는, 독자 또한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고정된 공간은 인물의 감정을 따라다니며 분절된 시간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집’에 남은 기억과 냄새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네가 금요일 밤에 날 방문한답시고 문을 두드리고, 언제나 다르게 흉내 내는 빌어먹을 네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난 상상할 수도 없어. 그럴 땐 뒷문을 통해 길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 생각해 봤니, 에두아르? 이 집안에서 네가 진짜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아무도 몰라!"

 

매달린 집 | 미셸 트랑블레 저

 

 

희곡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성소수자, 근친상간 관계 또한 동시에 다루며 이것들이 서로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알베르틴과 에두아르 간의 갈등이다. 알베르틴은 에두아르의 모습과 행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며 상처를 주는 말들을 쏟아내지만, 에두아르는 분노를 표하는 계속해서 대신 웃어넘기려고 한다. 가족이란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에두아르와 알베르틴 모두 알고 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알베르틴에게 계속해서 다가가는 것을 선택하고, 알베트린은 우울하고 유약한 기질 속에서도 에두아르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이 불완전한 끈이 바로 가족의 모순이자, 지속의 이유다.

 

가족의 숙명은 결속일까, 혹은 분열일까. 한 개인이 자신을 설명할 때 가족을 제외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고,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가족의 그림자와 함께 자란다. 설령 관계를 끊는다 해도, 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긴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늘 사랑과 폭력의 경계에 있다. 누구도 악의 없이 서로를 억압하고,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매달린 집>은 그 부조리의 연쇄를 담담히 응시한다. 극이 결말에 다다랐을 때, 마티외는 마르크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에두아르와 알베르틴은 서로의 마음을 일부분 확인하고, 조자파와 빅투아르는 도시로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막이 내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집’이 사라진 자리의 기운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마지막에 가서 희망을 말한다. 아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세대의 사랑과 가능성을 상징한다. 어른들이 상처와 결핍으로 흔들리는 동안, 아이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웃는다. 이는 대물림되는 슬픔 속에서도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매달린 집>은 가족을 무작정 비판하거나 긍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구조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가족은 완전한 사랑의 단위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조금씩 정화해 나가는 반복의 단위일지도 모른다. 탁한 물에 맑은 물을 계속 부어 조금씩 희석하듯, 세대를 거듭하며 상처를 희미하게 만들려는 노력 말이다. 그것이 완전한 치유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의 희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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