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체육복을 입은 소녀(이한서 분)는 노란 플라스틱 박스 안에 신문을 차곡차곡 쌓은 뒤, 능숙하게 박스와 구루마를 단단히 고정하고 밖으로 나간다. 신문 배달을 하던 소녀의 눈은 실종 아동 전단지에 잠시 고정된다. 적당한 날씨 속에서도 땀을 흘리는 여인(이봉련 분)이 착실하게 붙여낸 것이다. 그녀가 붙인 전단지는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타인의 눈에 들어올 만큼 빽빽하게 붙여져 있다. 슈퍼 앞에 잠시 멈춘 소녀는 구루마를 정비한다. 곧이어 여인도 슈퍼 쪽으로 걸어오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아이스크림과 전단지를 소녀의 손에 쥐어준다. 곧장 아이스크림을 뜯어서 먹지 않고 전단지를 물끄러미 보던 소녀는 슈퍼 앞에 자리 잡은 벤치에 앉는다. 계산을 마치고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을 산 여인은 소녀의 옆에 앉고 아이스크림을 뜯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한다.
장선희 감독의 단편 영화 <두 여인>은 소녀와 여인의 대화를 통해 같은 시대를 지나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감독이 밝힌 연출 의도는 다음과 같다. “나라가 가난하고 의무 교육이 없던 시절. 그 시절에 태어나 21살에 결혼한 엄마는 살면서 하고 싶은 걸 한 번도 못 해봤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살았다는 엄마를 보며 그 세대의 여성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간결한 대화를 통해 영화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여성의 삶을 조명하며 현재에게 질문한다.
엄마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립스틱을 선물하려다 진열대에 올라온 립스틱을 쏟은 열두 살 소녀는 변상하기 위해 신문 배달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소녀를 보며 여인은 용감하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소풍을 가지 못하는 것보다 자신이 신문사에 중학생이라고 거짓말한 사실이 들통날까 봐 걱정하는 소녀를 보며 여인은 스스럼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역시 소녀도 자신의 엄마에 대하여 말한다. 소녀의 엄마와 여인의 삶은 주고받는 말을 통해 길게 직조된다.
외동딸로 태어난 여인은 출판업에 종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대학에 진학한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부어주는 어머니가 있기에 가능했다. 대학을 나온 여성이 드물었던 시절이었음에도 여인은 졸업장까지 받으며 학사를 따지만, 곧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일은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인에게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한다. “다들 나한테 애만 잘 키우면 된대.” 그럼에도 간절히 일을 하고 싶었던 여인은 “오래 설득을 해서, 아니 빌어서” 겨우 잡지사에 취업한다.
남편보다 높은 급여를 받고 승진도 하며 자기만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갔지만 집안일은 당연히 여인의 몫이었다. 몸이 세 개인 사람처럼 바쁘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마치 죄인처럼 지냈다고 여인은 회고한다. 순진한 눈으로 돈을 잘 버는데 왜 죄인이 되냐고 묻는 소녀에게 여인은 담담하게 답한다. “사람들이 여자들은 아기를 낳고 밥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같은 맥락으로 여인의 딸이 학원에 갔다가 실종되었을 때도, 원인은 직장을 다니는 여인의 잘못으로 돌아오고 그건 여인의 업보로 자리매김한다. “돌아오지 않는 게 아줌마가 일을 해서 그렇대. (…) 집에서 애 키우고 살림을 하지 않아서 그렇대.”
반면, 딸 네 명과 아들 한 명으로 꾸려진 집안에서 장녀로 태어난 소녀의 엄마는 대학은커녕 중학교 졸업마저 고사하고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이 해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입이라도 하나 더 줄이고자 소녀의 엄마는 세 번만 본 남자와 스무 살에 결혼식을 올렸다. “엄마처럼 안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항상 그 말만 해요.” 소녀의 말을 듣는 여인은 어렴풋이 그 삶을 짐작하고 익숙함과 씁쓸함이 감도는 얼굴로 가만히 듣는다.
여인과 소녀의 엄마는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게도 교집합은 존재한다. 남아선호사상이 압도적이었던 시절, 슬하에 딸 한 명을 두었던 여인은 종종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곤 했었다. 아들이 없는 이유에는 여인이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꼬리표가 달린다. 소녀의 엄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장녀인 소녀를 낳은 뒤, 아들을 낳으라는 집안 식구들의 성화에 밀려 소녀의 엄마는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아들을 낳는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소녀는 가정 내 모든 호의를 받는 남동생과 비교되어 불공평한 처지에 놓이게 되지만 오히려 속 깊은 말을 한다. “저는 다 알지만 모른 척해요. 어쨌든 동생 덕분에 엄마가 구박을 안 당하면 좋은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여인은 소녀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엄마에게 현재 신문 배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꼭 소풍을 가라고. 딸과 나이가 비슷한 소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어루만져주며 혼자 다니지 말라는 걱정의 말도 남긴다. 여인이 떠나고 소녀는 실종 아동 전단지를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배달할 신문 사이로 전단지를 하나씩 끼워 넣는다. 여인이 아이를 찾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짧은 러닝타임, 한정적인 공간, 대사 위주의 흐름으로 구성된 영화는 남아선호사상, 일하는 여성을 향한 손가락질, 그리고 아동 유괴 사건을 불러오며 그 시대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제정신으로 버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엄마의 삶을 차분한 어조로 털어놓는 소녀와 여인의 대화는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말미에서 사람들의 냉대를 받고 자식마저 잃은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줌마는 시간을 돌려서 옛날로 돌아가도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야. 그리고 지금은 내 딸을 꼭 찾을 거야.” 억지로 누른다고 사그라들 슬픔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인은 소녀에게 따뜻한 격려를 남기고 자신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 여인의 태도는 지난 세월을 악착같이 버텨온 여성들의 거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무렵, 새 학기가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들은 매번 비슷한 말을 했다. 남자 아이보다 여자 아이가 적으니 이 중 몇 명은 결혼을 하지 못할 거라고. 여아의 수가 남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고 정기적으로 짝을 바꿀 때면 남자 아이들끼리 짝꿍이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여자 아이들끼리 책상을 붙여서 앉는 경우는 없었다. 그 광경이 어린 내게는 기이하면서도 신기했고, 나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타의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여아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단 내가 다녔던 학교 안에서만 일어났던 특별한 증상이 아니라는 것도. 나름 열려 있는 사고를 가졌다고 믿은 우리 집에서도 딸만 둘을 낳은 엄마가 그래도 한 명은 아들이기를 바랐다는 아쉬운 소리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적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을 보고 나면 늘 반복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어떤 이들의 상처에 대해, 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손에 쥔 채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된다는 것. 세상이 일정 부분 변화를 맞이했다고 한들 그건 말 그대로 일정 '부분'일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찝찝하고 시큰한 감정을 오래 곱씹어봤자 항상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두 여인>의 엔딩을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날은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도 자꾸만 되감기 버튼에 손이 갔다. 앉은 자리에서 나는 소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여인의 모습과 여인이 떠난 뒤, 신문에 전단지를 끼워 넣는 소녀의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그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지금 하는 행동들에 내가 감지해 내지 못한 의미가 담겨 있느냐고. 그 움직임에서는 소량의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