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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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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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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은 왜 창조되었을까? 누가 무슨 이유로 그걸 만들었을까?


 

나는 미지의 것들이 실재한다고,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라기보다 믿게 만들려는 이유, 의도가 뭘까 언제나 골몰하는 편이다. 귀신, UFO, 외계인, 천국과 지옥, 신 등등. 그 이유, 의도를 알게 되면-믿는 차원과는 다르지만-그걸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를 내 입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걸 떠나서, 그것의 기능, 효과, 의미, 재미 등등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며, 거기서 몇몇 인상적인 요소를 끌어와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판가름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미지의 것들에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그것들을 믿게 만들려는 이유, 의도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기이한 사건, 낯선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라도 다 읽고 나면 좀 더 그 세상과 그 인물의 내면에 가까워진 기분이 드는 것처럼. 세상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없다면, 그러니까 이유, 의도가 없다면 나는 무언가들을 불신하기보다도 정말로 공허할 것만 같다. 결국 우리는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닐까? 현실의 몇몇 부분을 떼어내어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게 이 삶의 전부인 건 아닐까?

 

 


단테의 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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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세 편으로 이어지는 서사시다. 이번 연극은 그 세 편을 극으로 보여주는데, 여러 재밌는 요소가 들어 있다. 원작도 이 연극도 그렇고 단순히 지옥, 연옥, 천국을 보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걸 보러 가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를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인도하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 이 주체들은 문학가들이다. 보러 가는 주체는 이 이야기의 작가인 ‘단테(한윤춘 배우)’이고, 인도자는 한때 이야기의 창조자였던 시인 ‘베르길리우스(정동환 배우)’다. 혼란스러운 피렌체를 떠나 숲을 헤매고 있던 단테는 위기 속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그는 이미 죽은 인물인데, 단테가 사랑했던 천국의 성녀 ‘베아트리체(신수민 배우)’가 요청해서 단테를 데리고 사후세계를 여행시켜 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는 단테를 따라 지옥과 연옥, 천국을 구경하게 된다. 마치 롯데월드 어트랙션 ‘신밧드의 모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극이다.

 

 


지옥은 징벌의 장소


 

작가가 직접 인물로 등장하다 보니 그의 관점이 이 낯선 장소들에서 묻어난다. 그 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단테가 머물다 도망쳤던 이탈리아 피렌체 사회를 풍자한다.


1막에서 2막 초반부까지는 지옥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지옥 부분에서 놀라웠던 건 몇 번째 구역의 몇 번째 장소라는 식으로 지옥의 장소가 상세한 구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분과 그들의 벌은 그들이 이승에서 지은 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옥에 간 단테는 이미 죽은 자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가며 여러 죽음의 위기를 몸소 겪어낸다. 그러면서 마주한 지옥 속 인간들에게 단테는 당신은 무슨 죄를 지어 여기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살아있는 인간 단테에게 낱낱이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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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부터 지옥이란 징벌의 공간임이 두드러진다. 이승에서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저승에서, 그러니까 죽은 후에 더 큰 고통으로 처벌을 받을 것임을, 그러니 어떤 죄든 처벌받을 것임을 상기시킨다. 사후세계가 심판의 장소로 표현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승에서는 제대로 된 심판이 치러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후세계 처벌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이승에서부터 양심을 갖고 악을 삼가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르지만 같은 지옥


 

서양의 지옥만 이런 형국인 게 아니다. 영화화 되기도 했던 웹툰 <신과 함께>는 망자가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 이야기인데, 불교적 전승에 따라 7일마다 한 번씩 총 7번의 재판을 받으면서(그래서 49재) 망자의 이승에서의 삶이 드러난다.


15세기 조선의 문인이었던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 중 <남염부주지>는 지옥으로 통칭되는 ‘염부주’를 통치하는 ‘염마’, 염라대왕이 등장한다. 이승에서 죄지은 자들은 염부주에서 염마의 통치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저승을 믿지 않다가 꿈을 꾸어 염부주에 가게 된 유학도 ‘박생’은 염부주를 만나 혼란스러운 사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큰 인상을 남겨 후에 염부주의 후계자가 된다.


이렇듯 사후세계가 이승에서의 죄를 상기시키기 위해 벌받는 사회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사회적 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 이야기로 사회의 기틀을 바로잡아야만 인간이 악과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죄악과 도덕을 가르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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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지옥 속 인물들을 보며 연민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단테가 마치 재판관 같다. 관객은 지옥 속 인물들이 짊어지는 벌을 볼 뿐만 아니라 많은 걸 알고 있는 단테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직시하게 된다.

 

 


단테의 관점, 기독교와 로마


 

그들의 죄를 통해 단테의 기독교적 관점이 묻어난다. 동성애 금지 같은 요소, 종교 개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에 대한 분노도 크게 드러난다. 이 이야기가 14세기에 쓰였다는 게 떠오르는 부분이다. 후에 연옥과 천국으로 건너가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 극의 시작과 인터미션 전에 이름 없는 역할로 등장하는 문경희 배우는 관객에게 거리를 두며 보라고 언질한다. 나는 그 말이 위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거리가 오히려 이 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서. 객관적으로 인간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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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은 당시 사회에서 잘못을 저지른 악한들도 있지만 신화 속 인물들도 있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마다 단테는 그자가 어디서 무얼 하다 죽었는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 이야기를 속속들이 읊는다. 놀라운 건 그중에 ‘오디세우스’가 있다는 사실. 오디세우스, 이타카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의 영웅이었던 인물, 승리 후 귀향하는 일이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로 적히기도 했던 그는 단테가 창조한 지옥에서 벌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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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이 재밌는데, 바로 단테를 이끄는 시인 베르길리우스 때문이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자신의 신화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십여 년간 전속 작가로 서사시를 지었다. 그게 바로 <아이네이스>로, 로마의 시조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이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장수로, 트로이 전쟁 패전 후 살아남아 이탈리아로 가서 로마의 전신이 되는 도시를 세운 인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 군림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이 이야기이길 바랐으며, 그 얘길 듣고 고심하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이때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본떠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 패망 후 로마로 향하는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지었다(둘 사이에 유사한 내용이 많다). 그리고 그 서사시에서 예언처럼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언급하면서 그가 황제로 등극할 명분을 아주 단단하게 다져주었다.


그 점에서 트로이의 후손이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오래전 적국인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미워했을 것이고, 베르길리우스를 따랐던 이탈리아 시인 단테도 같은 마음이라 오디세우스를 지옥에 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이야기는


 

누군가의 전쟁 영웅이 누군가에겐 지옥의 죄수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신화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신화는 국가나 통치자의 입장과 입맛에 맞게 지어진다. 신화라는 거대한 이야기는, 결국 거대한 통치의 시작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로 기능했던 셈이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고 사회를 다스리는 기틀이 되었던 이야기가 수많은 군주가 죽고 나라가 멸망하고 뒤바뀌어 그 기능이 상실되고 역사의 시선에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를 받는 지금도 전해진다는 점, 누군가는 그 오래전 이야기를 각색된 연극으로 직접 눈앞에서 본다는 점에서 이야기란 인간보다도, 권력보다도, 생명을 가진 무엇보다도 생명이 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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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래전에 탄생한 이야기가, 긴 시간을 거치며 다양한 것들을 파생시켰고 그 파생된 것들이 사회에 누적되고 자리 잡으며 일정한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오래전 이야기가 이야기되는 게 아닐까. 유효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야기는 강하고, 그 강함 자체가 삶에 의미가 되어주는 게 아닐지. 잘은 모르겠더라도 우리는 그 의미를 재미있게 곱씹으면 된다. 그것이 이야기가 이야기답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배우라는 실존적이면서 신적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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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렇게 단테의 신곡 내용에 집중해서 감상을 쏟아내고 있지만 내용에 몰입하려면 애초에 그 주변들, 묘사가 중요하다. 지옥에서라면 고통의 묘사가. 연극이라면 그 내용을 실감할 수 있는 무대장치와 소품, 연기가 관건이다. 이번 극에서는 배우들의 역할이 정말로 컸다. 특히나 앙상블 배우들이 일인다역과 여러 무용과 액션을 무리 없이 소화하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인간들을 보여주는데. 그들의 실감 나고 도전적인 연기에 지옥의 다양한 형태들을 직접 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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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보며 기겁하거나 화를 내거나 안타까워하거나, 베르길리우스에게 무언갈 알리거나, 기절하거나 죽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단테 역할의 한윤춘 배우는 우렁찬 목소리와 과감한 액션으로 그가 지옥을 떠돌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고, 베르길리우스 역할의 정동환 배우는 준엄한 목소리로 단테를 안내하고 지옥의 망령들을 향해 호통치며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결국 극을 만드는 건 배우였다. 배우는 무엇도 아닌 무대에 서서 시간을 불러일으키고 공간을 호출하고 연기로 인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신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존재다. 이번 연극을 보며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다시 이승에서


 

지옥 이후 연옥과 천국은 짧게, 그리고 좀 더 어려운 사상을 통해 등장해서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하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단테가 그렇게 여행을 마치며 인간과 세상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얻어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인생에서 염두해야 할 건 천국보다도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원전 자체가 탐구해 보고 싶은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극 또한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서로 조화롭게 연기하며 긴박감 있게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살면서 보았던 연극 중 가장 진땀 나고 문학적이며 실감 나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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