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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끝이 없을 것 같던 더위가 드디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침 공기부터 달라진 걸 느낀다.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면 폐 깊숙이 찬 공기가 가득 차고 비로소 9월이 왔다는 걸 실감한다. 계절을 맞이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새벽의 서늘한 냄새를 온몸으로 받으려 산책을 나가고, 누군가는 옷장을 정리하면서 한발 먼저 가을나기를 준비한다.

 

나 같은 경우는 먼저 영화를 고른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날, 창문을 반쯤 열고 창틀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 습한 바람과 함께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았을 때처럼. 혹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시기, 누런 조명만 빛을 발하는 어느 저녁에 <남매의 여름밤>을 보았을 때처럼.

 

계절의 풍성한 내음을 한껏 머금은 영화를 틀 수도 있겠지만, 어떤 날은 내가 먼저 계절을 불러오기도 한다. 더위가 물러난 이 환절기, 가을이 가진 고독과 외로움을 먼저 맛보게 하는 영화들을 떠올린다. 쓸쓸함을 넘어서 사랑이 무너지는 처절함을 품은 세 편의 영화.

 

 

 

<블루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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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사랑을 꿈꿔 본 적이 있는가? 열정 하나로 모든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로만 바라봐도 배부를 것 같은 사랑. <블루 발렌타인>은 그런 열정만으로는 사랑을 이어 나갈 수 없다고, 기대를 무너뜨리는 영화에 가깝다. 여느 연인처럼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함께 하겠다는 맹세가 단 한마디 말로 쉽게 깨져버리는 순간 사랑의 맹세라는 것은 얼마나 약하고 가벼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굳건하고 영원할 것 같은 맹세도 결국 말에 불과하다. 말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어서, 홧김에 뱉어버린 말 한마디로 부서지고 깨지기 마련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다.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던 연인의 모습, 그리고 더 이상 마음속에 상대를 위한 자리조차 남지 않은 부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신디(미셸 윌리엄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딘(라이언 고슬링)의 모습을 보면 사랑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지면서도. 작은 바람에도 뚝- 소리를 내며 끊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관계의 끈에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 놓아버리게 된다. 노력과 이해만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시점이 온다. 대화 한마디 없이도 관계의 끝을 직감할 수 있을 때, 현실의 씁쓸함과 잔혹함은 한꺼번에 밀려온다.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잠시 감추고 덮어버릴 수는 있어도, 끝내 같음으로 바꾸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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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한 편이 또 있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평화롭던 한 여자의 인생에 낯선 남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던 관계에 숨어있던 권태로움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중경삼림>에는 이런 유명한 대사가 있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대사처럼 사랑의 끝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내 마음의 시계를 누군가와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사랑은 감정이기에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사람마다 그 유효기간은 다르지만 대체로 3년쯤이라고 한다. 그쯤 되면 호르몬이 주는 설렘은 희미해지고 새로운 열정을 찾기 위해 나서거나 권태기에 빠진다고들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결혼 후에는 이제부터는 정으로 산다고 말한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애틋함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을 다른 감정으로 채워야 한다. 영화 속 마고(미셸 윌리엄스)와 루(세스 로건)은 일반 부부처럼 책임과 배려로 유지되는 안정적인 관계의 부부였다. 그러나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사랑이 쉽게 스며들어 자리를 차지하기 쉽다. 마치 마고가 끌림을 이기지 못하고 대니얼(루크 커비)에게 떠나버린 것처럼. 이번만큼은 사랑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결과는 이전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새 신발도 결국 헌신이 되어버리듯, 모든 관계에는 익숙함과 권태가 찾아온다.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 힘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덧없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결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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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야기>는 제목과 달리 부부의 이혼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진흙탕 같은 법정 싸움,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장면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앞선 두 작품과 다른 감정선을 가진다. 비참함과 처절함보다는 뭉클하고 따뜻한 온기가 서려 있다. 현실적인 문제도 이기지 못하고, 권태로 무너져버린 관계도 결국은 내가 인생을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해결해야 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관계의 마침표를 찍는 여정을 바라보다 보면 오히려 그들이 한때 서로를 얼마나 아껴왔는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혼도 결국 결혼의 연장선이라는 말이 와닿는 영화다.

 

영화는 서로 사랑하기에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관계 속에서 오고 가는 섬세하고 세밀한 감정을 묵직하게 다룬다. 누가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끝까지 버티다 뒤돌아선 순간 눈물을 쏟아내는, 세상을 다 잃은 듯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같은 장면이어도 그런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들 말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가차 없는 말다툼 장면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도. 대문을 함께 닫을 때 스치는 두 사람의 애틋한 시선, 떠나보내는 길에 풀린 신발 끈 하나조차 눈에 걸려 묵묵히 매주는 손길이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절로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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