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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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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2시 22분>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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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2시 22분>은 130분 동안 공간적 배경이 바뀌지 않는다. 무대는 단 하나. 한 부부의 집 거실. 시간적 배경도 마찬가지다. 반나절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등장인물도 단 4명이다. 남편이 출장을 가 있던 지난 며칠간 새벽 2시 22분이면 귀신 소리가 들리고, 그 귀신이 갓 태어난 딸을 공격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제니. 그런 제니에게 말이 안 된다며 면박을 주는 방금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 샘. 마침 놀러 온 친구 부부 로렌과 벤까지 넷이서 직접 2시 22분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연극은 무대 위 시계가 2시 22분을 향해 가는 동안 네 인물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장소도 변하지 않을뿐더러 일상적인 대화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을 조건이다. 하지만 그 어느 극보다 몰입하고 경악하고 심지어 삶을 통찰까지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2시 22분>은 관객이 2시간 동안 네 등장인물과 함께 미쳐가는 극이다. 관객은 2시 22분이면 찾아오는 게 정말 귀신인지, 아니면 제니가 잘못 들은 건지 끊임없이 추리하며 극을 쫓게 된다. 제니는 곧 죽어도 귀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샘은 그런 제니를 은근히 무시하며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묘한 현상을 온갖 현실적인 근거를 대며 부정한다. 갈등은 점점 극으로 치달아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집을 나가버리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의 성별이나 성향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것이다. 과학적으로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관객은 샘과 함께 미쳐갈 것이고 귀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관객은 제니와 함께 미쳐갈 것이다. 제니와 같은 여성이자 영적 존재를 믿는 나는 후반부에는 거의 샘을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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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샘과 제니의 이야기는 어쩌면 갈등의 무대가 된 요즘 시대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기사, SNS, 심지어는 귀여운 동물 동영상에서도 사람들은 싸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려. 어떻게 이 정도로 자기확신에 차 있는지 본인이 믿는 것을 진리로 만들기 위해 서슴없이 상대를 공격한다.


극의 중반쯤 샘의 친구 로렌은 샘에게 한마디 한다. 중력을 이해한다고 해서 추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그 이후에도 샘은 계속해서 추락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2시 22분이 되기 직전.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 것인가! 모두가 숨죽인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경찰. 연극이 끝날 즈음 갑자기 등장한 새 인물에 의아할 새도 없이 그가 내뱉는 말은 관객을 충격에 빠뜨린다.

 

“부인, 샘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순간 어느샌가 무대에서 사라진 샘의 울음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진다. 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딸의 침대를 서성이며 꺼이꺼이. 인간보다는 로봇에 가까워 보였던 샘의 처절한 울음소리로 극은 끝난다. 출장 중 실족사한 샘이 귀신이 되어 매일 새벽 집에 찾아온 것이다. 차마 두고 갈 수 없는 딸을 보며 엉엉 울었던 것이다.

 

화가 날 정도로 사실과 논거, 과학을 논하던 샘은 결국 본인에게 슬픈 일이 생기자 귀신이 된다. 그토록 존재를 부정하던 귀신 말이다. 이때 ‘샘 네가 틀렸네. 꼬시다.’ 하고 비웃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거다. 놀리기엔 샘의 울음소리가 너무나 서럽기 때문이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릴지를 기대했으나 결말을 알게 된 순간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대신 극 중 로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중력을 이해한다고 해서 추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돌이켜보면 샘의 주장은 대부분 인용이다. 과학계에서, 천문학에서는, 연구에 따르면, 책에 나와 있듯이… 본인이 공부해 온 이론에 사로잡혀 급기야 눈앞에서 일어나는 초현실적인 현상도 못 본 채 해 버린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그가 펼친 주장 중 오답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샘의 삶의 답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정답일 수는 있어도. 샘의 답은 아니다.

 

 

 

 

세계적인 수학자 허준이 교수는 서울대학교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중략)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기. 그것이 샘에게 필요했던 태도일 테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닌 내가 ‘겪는 것’에 집중하기. 세상을 다른 이들이 정의 내려온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언어를 사용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기. 게다가 삶은 모순마저 용납한다구!

 

자신이 경험한 것들로 삶을 풀이하다 보면 저절로 타인의 풀이 과정에 대한 존중도 생기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남을 가르치거나 평가하려는 마음도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허준이 교수가 축사를 마치며 말한 것처럼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그 세상에서의 샘을 만나고 싶다. 샘, 귀신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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