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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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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 살 무렵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와, 쭉 그곳에서 살고 있다. 노인 인구가 많았으며 수도권이라기엔 다소 시골 같은 경관을 가진 곳이었다. 주변 친구들 역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투자 목적으로 이사 온 가족이 많았다.

 

곧 시작될 것이라던 재개발 사업은 매해 이런저런 반대와 이유에 미뤄졌고, 오랫동안 구옥 주택가와 전깃줄이 훤히 드러나는 거리, 시대에 뒤떨어지는 상가와 오래된 학교 사이를 오가며 자랐다.

 

결국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됐고, 그러자 동네 곳곳엔 빨간 전단지가 붙고 이런저런 현수막이 걸렸다.

 

"이러다 모두 다 죽습니다!"와 같은 필사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입시를 준비하며 종종 재개발 지역과 할머니에 대한 시를 쓰곤 했는데, 그때 배우던 선생님으로부터 "요즘은 잘 안 하는 이야기"라며 올드하다는 평을 들었다.

 

글쎄, 그 절망적인 언어 뒤로 어떤 삶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낡은 이야기는 낡았다 뿐이지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다.

 

이수명의 시집『도시가스』에서는 도시와, 이러한 도시를 이루는 가스관을 주목한다.

 

 

 

1. 가스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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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관이 노출되었다.

가스관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그게 좋겠다.  

아름다운 경관이 좋겠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가스관은 대열을 이루어 기어가고 있다.

기계적으로 충돌하지 않고ᅠ

외벽을 덮고 있다. 순수한 가스관

일상생활이라는 테마가 좋겠다.

버려진 다세대 주택가는 붉은 가스관으로 뒤덮여 있다.

주택 전체가 팔려서 마을 전체가 팔려버려서

우거진 잡초 속 가스관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ᅠ

가스관에 들러붙은 것처럼 보인다.

노후한 가스관을 타고 내려간 사람들이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다


- 「가스관」 전문

 

 

이수명은 맨홀 뚜껑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뚜껑을 열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뚜껑,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존재하는 것은 그저 無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시는 『도시가스』라는 이 시집과, 「도시가스」 연작이 형성되는 시적 세계의 방침이 드러나는 시이다. 해당 연작에 대한 시작노트에서 이수명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다. 무엇과 가까이 있기도 어렵고, 무엇을 알기도 어렵다. 그럴 때 가스가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서울은 거의 모든 가구에서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공간이다. 도시가스 없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구성하는 체계는 작동하지 않으며, 건물 외벽 곳곳과 바닥 밑에 배관들이 잔뜩 매립되어 있다. 그런 도시의 풍경을 그려내며 시인은 "매일 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이 『도시가스』는 그런 '가스관'이라는 표면으로 구성된 도시의 모습을 그려내며, 도시와 세계를 이루는 표층을 아주 미세한 얇기로 깎아내고 있다. 버려진 다세대 주택가와 팔려버린 마을 전체-구시대 주택 개혁, 그리고 이제는 재개발의 대상인-는 수직과 수평의 대열을 이룬 가스관으로 외벽이 뒤덮여 있다.

 

이처럼 시 속에서 도시, 즉 세계는 마치 거미줄 같은 가스관으로 짜여 있는 공간이다. 그 위의 사람들은 마치 가스관에 들러붙은 것처럼 보인다. 노후한 공간에서 쫓겨나 다른 도시, 다른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은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며, 그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시 속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노후한 가스관들은 재개발이 시작되면 "최신형이고 다 좋은" 배관으로 교체되겠지만, '최신형'이란 늘 새로 갱신되는 것이기에, 사라진 사람들의 자리를 채우는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후해 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들 역시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무한히'라는 부사는 이러한 순환을 의미한다.


'가스관'이라는 나란하고 촘촘한 배열로 구성된 세계를 그려놓은 이 시는 그 외 나머지는 전부 지워냈다. 가늘고 일률적인 이 배열이 '언어'와 닮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은 건조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뚜렷하게 지칭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약속된 언어 위에서 유유히 배회한다. 시에서 포착하는 것들은 아주 미세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며, 명확한 이미지를 포착하기보다는 단순한 언어를 헐겁게 엮어낸다.

 

그렇게 비워놓은 공간에서, '같은 뼈대', 즉 시적 논리를 공유하는 시적인 순간과 언어가 그 사이를 대신 메우고 있다.


 

 

2.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 시는 도시가스를 도시가스로 남겨 두고 싶어하는, 시 쪽으로 끌어오려 하지 않는, 시 같지 않은 시다. 시의 본분을 잊은 것이다.


본분을 잃고 본분이 없는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것을 해보고 싶다.


그냥 사물들로 존재하는 세계를 만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이런 시도로서의 시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시라고 하는 것이 또 이상하지가 않다. 나는 시를 이렇게 저렇게 정의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도시가스」를 통해 내게 닿아있는 무엇인가를 감지한다면 그 짧은 순간을 무어라 불러도 괜찮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잠시만 더 이 감지를 느껴보고 싶다는 것이다. 


- 시작노트 중

 

 

구성하고 있는 인식과 사유가 심오하면, 읽는 독자까지 왠지 경건한 태도를 갖춰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시집을 읽고 이런저런 비평을 많이 찾아봤는데, 철학적인 탐구와 함께 다뤄진 비평이 많아서 되레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해설 「무의 광장」에서 강동호 평론가가 말했듯, "이수명이 시에 관한 독보적인 사유와 첨예한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해서, 독자들까지 무겁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해설에서 그 무게를 풀어줘,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의 시 세계가 갖추고 있는 견고하고 철학적인 인식, 명확한 지칭을 지양하기에 뚜렷해지는 구조, 등을 탐지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리는 시가 가지는 성질 자체는 매우 얇은 표층 같다. 순간을 경유하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언어와 삶이 합일되는 어느 지점을 포착한다.

 

 

 

3. 무와 無 



 

평일에는 외출을 해야 해서 안전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마트에 가서 커다란 무를 사야 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무를 들고 와서 무를 잘라서 물을 넣은 유리병에 세워놓느라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물에 잠긴 무를 보고 있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쇼핑 카트를 끌고 외출을 해야 해서 안전 점검을 할 수 없어요

평일에는 점포 이전 후 새로 단장한 마트에 가서 입구 쪽에 진열된 커다란 무들 사이를 헤집고 다녀야 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새로 사 온 무 옆에 유리병들을 늘어놓고 어떤 유리병이 적당한지 고르느라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무를 새로운 형태로 잘라서 물을 넣은 둥근 유리병에 세워놓느라고 점검을 할 수 없어요

어제 물에 잠긴 무 옆에 오늘 물에 잠긴 무를 보고 있어서 점검을 할 수 없어요


- 「도시가스」 전문

 

 

「도시가스」 연작 세 편, 그리고 시집 내의 시 몇 편에 '무'는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무'란 당연하게도 '無'와 의미를 공유한다. 위 시에서 화자는 "평일에는 외출을 해야 해서", "마트에 가 커다란 무를 사야 해서", "무를 들고 무를 잘라 유리병에 세워놓느라", 등등의 사유로 '점검'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의 '점검'은 가스 점검이다.

 

24쪽의 「도시가스」에서 가스를 "색깔이 없고 냄새가 없고 무게가 없고 소리가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부드럽고 온화하고 은은하게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의 생각을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라 먼저 지칭했는데, 이 가스는 '삶'이나 '시간'과도 비슷해 보인다.

 

삶을 점검할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무'를 사, 매일 물이 담긴 유리병에 새로운 형태로 자라는 무를 보기 위해서이다.

 

외출을 하는 행위, 마트에 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 유리병을 고르는 행위 등은 정형화된, '소비'를 위해 구조화된 삶의 행위이다. 시집 내에 수록된 「물류창고」 연작은 모든 물자가 풍부해진 인간이, 창고에 보관하고 쌓아두며 '기호'에 따라 물건을 소비함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그 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은, 충실히 '소비의 세계'에 대한 규칙을 수행하고 있으나 그들이 구매하는 물건은 결국 無이다. 화자는 '평일' 즉 노동하는 날에 마트에서 無를 사와, 이를 구분하고 분류하고, 無를 들여다보며 삶을 점검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삶은 끝없는 소진이다. 고로 인간이 이 세상에 나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선명한 감각은 '無'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수명은 그런 없어질 것들, 이미 없는 것들을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언어를 배우고 언어로 만들어 낸 세계와 구조를 배우며 성장한다.

 

그것이 인간이 비존재의 세계를 헤매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일 뿐, 그것이 삶을 비관할 만한 이유는 못 된다는 것을. 잠깐 존재를 감지하는 순간을, 감각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지속될 필요는 충분하다고, 이수명은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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