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의 <데미안>
외국 문학을 접할 때, 우리는 번역가에 의해서 원문이 번역된 문장을 읽게 된다. 이때 어떤 번역가가 책을 번역했는지에 관한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원문이라고 해도 어떻게 번역되었는지에 따라서 나와 잘 맞는 책이 될 수도, 나한테 어렵고 생소한 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본이 많아 선택지도 많은 고전 문학 작품들의 경우에는 그 중요성이 더 커진다.
그렇기에 전혜린 번역가가 <데미안>의 독일어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가이자, 최초의 유학파 한국 여성 독문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읽게 된 이 책이 그런 전혜린의 최초 번역본을 되살린 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독일어 원문의 맛을 살리는 데 가장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설명까지, 내 기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처음 접한 전혜린의 <데미안>의 문장은 생각보다 낯설고 어려웠다. 특히 책의 가장 초반, 두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싱클레어의 말들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있는 힘껏 집중해야 했다. 그 밖에도 다시 또 읽고, 다시 또 읽어야 했던 문장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기대한 것만큼 대단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 번역본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문장을 곱씹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이해될 때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자 무언가 달라졌다. 그만큼 싱클레어와 데미안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더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전혜린의 번역본이 독일어 원문을 가장 잘 살린 번역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오히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읽는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이러한 ‘생각해 봐야 하는’ 추상적인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악을 구분하는 일
“사랑은 내가 처음에 두려워하며 느낀 것 같은 야수적인 어두운 본능도 아니었고, 또한 내가 베아트리체의 모습 속에서 구현시켰던 것 같은 경건하고 정신적인 숭배의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두 가지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사랑은 천사의 모습이면서 악마였고, 여자와 남자를 한 몸속에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면서 짐승이었고, 최선과 최악이었다.” (165p)
이번에 <데미안>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문장이다. 싱클레어는 유년기부터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싱클레어가 알고 있는 밝고 깨끗한 세계란 부모, 사랑, 아침의 찬미가와 가족들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였고, 하녀들의 스캔들과 욕지거리와 도적들과 음주와 성과 죽음 같은 일들은 어두운 세계에 속했다. 그는 앞의 선한 세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어두운 세계에도 끌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당황과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싱클레어의 모습처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것’에 속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악한 것에 발을 들이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과 수습되지 않는 불안을 느끼고 나 자신을 원망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과연 어두운 것은 ‘나’가 아닌가? 우리 인간의 ‘나’에게는 선하고 빛나는 부분만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본능적으로 어두운 것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이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선한 것과 어두운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앞에서 “사랑은 천사의 모습이면서 악마”라는 문장을 인용했듯, 모든 일은 선한 것과 악한 것. 이렇게 이분법적으로만 나눠지지 않는다. 우리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그 이상의 모습이 있고, 그 모습은 모두 나 자신의 모습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사랑도, 상황도, 그 무엇도 다면적인 모습을 가진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 자신과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한 일이 아닐까.
자기를 자기에게 인도하는 길
“어쩌면 나는 몇 년 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또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위험하고 끔찍한 목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 내부로부터 스스로 쏟아져 나오려는 것만을 살아보려고 한 것인데, 왜 그것은 그다지도 힘든 일이었을까?” (166p)
이 문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선악을 구분하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을 깨고 나오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것들 (이를테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분) 이 확실하게 우리 앞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싱클레어는 “내부로부터 스스로 쏟아져 나오려는 것”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내 내면이 이끄는 곳은 어디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남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곳은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꿈속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나 자신의 깊은 내면 속으로 데려갈 수 있기 위해선,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은, 무엇인가?
“세상에 있어서 자기를 자기에게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장애가 많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구절이 머릿속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