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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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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썸머 워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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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의 근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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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작품을 다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타이밍이다. 2009년 8월 1일에 개봉한 호소다 마모루의 <썸머 워즈>는 2010년 7월 30~31일을 배경으로 한다. 이 글의 기고 예정일이 7월 31일이니 적절한 셀렉트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1년 뒤의 세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근미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했을 무렵의 반응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인터넷과 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세계관으로 꽤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16년이 흐른 지금, 'OZ'라는 <썸머워즈> 속 가상세계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다.

 

이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메타버스'란 말 한 마디면 대강 감을 잡을 것이다. 이용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분신인 아바타를 통해 접속하는 인터넷 속 세상. 그곳은 단순한 게임이나 오락뿐 아니라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행정 서비스 등 실생활과 밀접한 기능을 통해 현실 세계와 연결되어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급부상했다가 팬데믹의 종식과 함께 침체기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교육, 의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기술이다.

 

한편 데이터 보안을 둘러싼 문제는 여전히 뜨겁다. 지난 4월 SKT텔레콤의 대규모 유심 해킹 사고로 국민의 절반이 불안에 휩싸였다. 이후 SKT텔레콤의 가입자 수가 급감하면서 보안은 이동 통신사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기술로 주목 받게 되었다. 한 기업의 보안 붕괴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광경은 OZ의 해킹으로 전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썸머 워즈> 속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런 대규모 사태가 아니더라도 각종 사이트에 회원 등록된 현대인들이 메일을 통해 개인 정보 유출 관련 사과를 받아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AI 역시 <썸머 워즈>가 예고한 오늘날의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공상과학 장르의 발전과 더불어 꾸준히 제기되어온 고전적인 주제다. 하지만 ChatGPT를 비롯한 AI 채팅 서비스와 생성형 AI 영상, AI 무기 등이 우리의 삶 속으로 부쩍 깊숙하게 들어오면서 이러한 질문은 어느 때보다 묵직한 무게감을 갖게 되었다. 작중 '러브머신'이라 불리는 해킹 AI가 전세계의 질서를 마비시키는 모습은 AI의 무분별한 사용이 낳을 결과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반영한다. 이렇듯 <썸머 워즈>는 2009년작임에도 가상현실, 데이터 보안 및 해킹, AI를 둘러싼 오늘날의 쟁점들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대립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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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썸머 워즈>가 가지는 매력은 단순히 현대 정보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예고한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호소다 마모루는 아내의 고향으로 상견례를 하러 간 경험이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밝혔다. 나츠키의 본가가 있는 시골 풍경은 감독 부인의 실제 고향인 나가노현의 우에다시를 참고한 것이다. 친척들 간의 왕래를 자주 경험하지 못한 감독은 왁자지껄한 대가족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그 분위기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주인공 켄지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 잘 드러난다.

 

 

아버진 지방에서 일하고 어머니도 워낙 바빠서 전 집에서 늘 혼자 지냈어요. 여럿이 밥을 먹고 화투놀이도 하고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어요. 정말 기뻤습니다.


 

수학 천재 소년 켄지는 어느 날 선배 나츠키로부터 사카에 할머니의 생일잔치에 함께 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알고 보니 그 역할은 단순한 동행이 아닌 위장 남자 친구였지만, 나츠키의 애원에 켄지는 결국 수락한다. 그리고 진노우치 가택에서의 첫날 밤, 정체 모를 문자 메시지에 담긴 암호를 풀었다가 OZ의 해킹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OZ를 혼란에 빠뜨린 진범은 ‘러브머신’이라는 AI였고, 그 개발자는 진노우치 가문의 서자 와비스케였다. 그렇게 가문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대가족의 전쟁이 시작된다.

 

OZ 속 비현실적 풍경과 사람 냄새 가득한 진노우치 가택의 여름은 언밸런스하면서도 독특한 조화를 자아낸다. 디지털 세계에서 벌어지는 AI와의 전쟁이지만 거기에는 가족을 지키려는 가족의 마음이 있다. 해킹에서 비롯된 전국적 혼란이 한 노인의 정성 어린 목소리를 통해 복구되는 모습은 인간의 진심이 지닌 저력을 보여준다.

 

그 AI의 이름 역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사카에 할머니와 갈등하면서도 그녀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와비스케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전 세계의 수많은 어카운트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러브 머신은 그의 결핍과 닮아있다. 그러나 협심증을 앓던 사카에 할머니가 OZ 혼란으로 응급처치가 늦어져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와비스케는 진노우치 가문의 전쟁에 합세하기로 결심한다. 불리한 전세로 위축된 그들의 사기를 뒤늦게 발견된 유서가 북돋는다.

 

 

가족끼리는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인생에 져서도 안 된다. 힘들고 괴로운 때가 와도 변함없이 가족 모두 모여서 밥을 먹거라. 가장 나쁜 것은 배가 고픈 것과 혼자 있는 거란다.


 

 

세계라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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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말이 존재할 만큼, 식사는 가족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다.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밥을 나누어 먹는 행위는 초연결 사회의 촘촘한 전산망으로도 불가능하다. 오직 그곳에 함께 있음으로써만 공유되고 자라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디지털의 허점을 아날로그적 공동체의 가치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단순하게만 읽히지는 않는다. 사카에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진노우치 일가가 꺼내든 카드는 ‘화투’. 나츠키와 러브 머신은 각자가 가진 어카운트들을 판돈 삼아 최종전에 돌입한다. 러브 머신의 어카운트들을 순조롭게 회수하던 나츠키는 한 번의 실수로 패배의 위기에 처한다.

 

그 순간 이름 모를 독일 소년이 그녀에게 어카운트를 빌려주겠다고 나선다. 곧이어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다른 수많은 이들의 어카운트가 나츠키에게 전달되고, 그녀는 전 세계의 응원에 힘입어 러브 머신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다. ‘어카운트를 드릴 테니 우리의 소중한 가족을 꼭 지켜내 주세요’라는 메시지는 디지털 공간이 인간의 진정한 유대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그런 유대를 통해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또 다른 세계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썸머 워즈>의 메타버스적 세계관은 전원적 공간과 공동체적 감성과 맞물려 특별한 의미를 획득한다.

 

 

 

마법의 단어는 까탈스런 대머리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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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머신이 켄지에게 보낸 암호문은 ‘The Magic Words are Squeamish Ossifrage’이다. 이는 RSA 암호의 발명가들이 1977년에 공개한 암호의 정답 문장으로, 129자리 숫자(RSA-129)를 인수분해해야 풀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인터넷 뱅킹이 RSA-2048 암호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이 암호가 풀려 악용된다면 OZ처럼 큰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글의 초고는 노트북이 고장 난 탓에 PC방에서 작성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해결되었지만, 재택근무 형태로 맡고 있는 일이 많은 터라 꽤 골머리를 앓았다. 긴 세월 동안 동고동락한 수많은 데이터와 무사히 재회하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실 노트북이 없더라도 펜과 종이, 혹은 그에 준하는 도구가 있다면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펜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셨는데 펜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거의 없어서 놀랐던 적이 있다. 군대에서 핸드폰 메모장으로 소설을 완성했다는 대단한 후배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보다 편리한 것을 찾아 손을 뻗는다. 나 역시 월급이 들어오면 새 노트북을 알아볼 생각이다. 좀 더 작고 가벼운 노트북을 사면 어디서든 펼쳐 놓고 일하기 편리할 것이란 기대에 벌써 마음이 흐뭇하다. 하지만 노트북은 돈을 벌게 해 줄 뿐 밥을 먹여주지는 않으니 바쁜 일이 마무리되면 고마운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해서 뜨거운 삼계탕이나 한 그릇 대접해야겠다. 여름만큼 사랑을 덥히기 좋은 계절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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