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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고등학생일 적에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나중에는 몰래 타방을 하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룸메이트와 한 침대에 엎드려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할 정도로 적응했지만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주 내내 동네 -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나의 정겨운 뿌리다 - 를 벗어난 그 얼떨떨한 기분에 어색해한 것을 기억한다. 내 선택이니 어쩔 수 없이 금요일 하교 시간까지 기숙사에 살아야 하긴 하는데 이게 참,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있다는 자유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과 평생을 살아온 내 동네가 아니라는 낯섦에 덜컥 눈물부터 나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건 결국 그리움이었던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리운 대상을 특정 짓다기 보단, 나의 정체성에 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평생을 살아온 환경, 나와 평생 살아온 가족들, 나를 평생 받아줄 따스한 나의 공간 모두를 떠나온 상황에서 나에게 익숙한 것을 쫓음으로써 발견하고 싶은 나 자신에 대한 필연적인 그리움. 잠깐이었지만 디아스포라가 되어 느낀 점은 내 앞에 도화지만이 덜렁 놓인 상태로 나를 그리라는 것과도 같았다.

     

디아스포라. 본토를 떠나 정착한 타지에서 자신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이야기한다. 쉬운 예시로 유대인, 집시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길고 긴 시간을 부표처럼 떠다니며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자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결코 내가 속한 사회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의가 정립되어야 하는데, 떠도는 삶에는, 떠도는 민족에게는 그런 게 없으니까, '나'는 설명이 가능해도 그 뿌리를 설명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나 자기 소개를 할 때 본인의 출신지 혹은 소속을 밝히기 마련이니까, 그걸 말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는 정체성을 찾는 것이 그 민족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의 기억을 통해 변화한 점이 하나 있다면, 하나의 이방인으로 타지에 나간 개개인도 자의든 타의든 하나의 디아스포라가 되어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떠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일상의 터전을 타지에 잡은 개개인조차 민족 개념이 아닐 지언정 타국에서 살아가는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의 개념이 넓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책 <벌집과 꿀>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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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벌집과 꿀>은 폴 윤 작가의 한국인 디아스포라를 다룬 소설이다. 이 책에는 타지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혹은 그것에 뿌리를 둔 개인이 나온다. '보선'은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소년이며 '주연'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탈북하여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다. 그런 개인을 바라보는 제3자도 나온다. '야마시타 도시오'는 '유미'라는 조선인 고아를 호위하는 사무라이다. '안드레이 불리빈'은 1881년에 고려인 이주지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러시아 장교이기도 하다. 이들의 일상은 잔잔하게 나열된다. 세상을 뒤흔들 사건이 발생하지도, 이들이 범죄에 휘말리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의 시간을 조용히 따라갈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허한 무언가가 얼핏 보인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되지는 않는다. 다만, 슬픔 - 이 복합적인 회색 감정을 슬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지만 - 을 품은 그들은 외롭다. 비척거리며 그들은 어딘가를 떠나 도착하고, 그 속에서 삶을 먹먹하게 살아간다.

 

'고려인' 장에 등장하는 '막심'은 아버지와 다음의 대화를 나눈다.

 

 

"막심, 두 번째는 뭐였지?"

"두 번째요?"

"네가 나한테 하고 싶다던 이야기." 아버지가 말한다.

"여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왔다면서. 두 번째는 뭐였지?"

트럭 앞좌석에는 소총을 든 교도관 두 명이 막심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다른 사람이 또 있나요?" 막심이 묻는다.

"다른 사람?"

"우리 가족이요." 막심이 대답한다. "다른 누군가가 더 있나요? 다른 어딘가에?"

"내가 그걸 어찌 알겠니." 바실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픽업트럭 짐칸으로 뛰어오른다.

 

 

'우리 가족'은 고려인을 의미한다. 따뜻한 고국을 떠나 춥고 척박한 중앙아시아 또는 러시아에 정착한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 고려인이라는 말에 남아있는 코리아, 한국에 대한 희미하고도 반짝이는 뿌리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막심'이 '바실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 궤를 잇는 물음이다.

 

'역참에서' 장에 등장하는 수행원은 '야마시타 도시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 그 연극은 더 이상 목수가 아니게 된 목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집 짓는 일만 하고 살아온 나머지, 그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지요. 온갖 곳으로 여행을 하며 자신에게 또 다른 삶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저 계속 떠나고 또 떠납니다. 연극은 그렇게 끝납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또 떠나는 장면으로요.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가 되고 싶어서 그 운명을 걷는 걸까? 분명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굴곡진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의 디아스포라는 역사적인 이유에 의한 디아스포라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로 떠다니며 살다 결국은 또 떠나는 삶을 살게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 문제인 걸까, 혹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비극인 걸까. 필자는 <벌집과 꿀>을 읽으며 후자의 책임에 대해서 결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벌집과 꿀>에서 떠나고 또 정착하는 이방인들에겐 다행히, 내면의 외로움을 위로해 줄 외면의 이웃들이 있었다. 물론 개개인이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고독함을 잠재울 수는 없겠지만 도움의 손길에 의해 이방인들은 잔잔하고 휘몰아치는 삶만큼이나 조용하고 단단한 위로를 받는다. 사회라는 건 개개인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모두가 디아스포라일 순 없겠지만 정체성을 찾아가는 삶이라는 건 모두가 공유하는 방향이다. 실제로 몇 달 전, 고려인의 생계를 돕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영상을 필자가 발견한 적이 있다. 비극적인 역사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그 역사의 희생자이자 끊임없이 정체성을 찾고자 떠다니는 고려인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도와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상과 비슷하게 고려인이라는 주제로 <벌집과 꿀>에서도 이방인을 다루고, 그 이방인을 돕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본인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확립 또는 삶의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본인의 정체성을 찾겠다고 타인의 사연에는 무관심했던 본인이 부끄러웠다.

 

<벌집과 꿀>은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디아스포라의 삶에 이입하여 쉽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은 책이다. 따라서 <벌집과 꿀>을 통해 우리 주변, 혹은 먼 곳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떠다니는 디아스포라를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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