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전시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전시가 있는가 하면, 여러 작가의 작품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다각도로 풀어내는 전시도 있다. 지난 5월에 다녀온 ‘Art of Luxury’ 전시는 후자에 가까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부터 앤디 워홀, 쿠사마 야요이 등 세계적인 작가들까지, 총 18인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럭셔리’의 개념을 탐구하는 전시였다.
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채롭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이어졌고, 특히 이 전시는 럭셔리 브랜드 R.LUX와 서울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해 그 자체로도 주목할 만했다. 전시장에서는 R.LUX의 향수를 직접 시향해볼 수 있었는데, 향기까지 더해져 오감을 자극하는 전시 경험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 즐겁게 감상한 이번 전시는 단순히 물질적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정신적인 가치 등 다양한 관점에서 ‘럭셔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들어서자, 직원분들께서 관람 방법과 동선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곧장 2층 전시장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선 전시장 내 첫 그림은 박수근 화가의 작품이었다.
책에서만 보던 박수근 화가의 작품을 실제로 눈앞에 마주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무래도 작품의 ‘질감’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려준 작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에서 설명된 것처럼 그의 작품의 질감은 매우 거칠어, 그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거친 질감 속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는 작품을 보며 당대 서민들의 삶이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강렬한 인상의 박수근 화가의 그림을 지나면, 신사임당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이어졌다. 여러 점의 초충도가 함께 전시되어 있어, 각 그림의 세부적인 특징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특유의 단정하고 깔끔한 색감과 안정된 구도에서 오는 고고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엄마는 특히 신사임당의 색채가 투명하게 비치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놓치고 지나쳤던 부분이었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나비나 꽃의 하늘하늘한 질감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함께 전시를 보며 엄마가 작품의 디테일을 짚어주는 순간들이 많았고, 덕분에 나 역시 그림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여러 챕터들 중 ‘이중섭의 사랑과 우정’은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본 챕터에서는 우리에게는 작품 ‘황소’로 익숙한 국민화가 이중섭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로서 조명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중섭은 생전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여러 장의 직접 그린 엽서를 보냈다. 전시되어 있는 엽서를 보면, 그림을 통해 아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던 화가 이중섭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진다. 기하학적 형태를 포착해 그 안에 이상과 관념을 담아내는 그의 그림 스타일은 이러한 작은 엽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운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그의 그림체는 또 다른 새로운 생동감과 재치를 느끼게 했다. 엽서와 그림들은 전시의 제목처럼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네 개의 관점으로 바라본 '럭셔리'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3층 ‘Art of Luxury’에서는 'Material Luxury', 'Spiritual Luxury', 'Timeless Luxury', 'Inspiring Luxury'라는 총 4가지의 주제로 구성된 전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럭셔리의 물질적인 특성을 탐색하는 'Material Luxury'에서는 단연 인상적인 쿠사마 야요이의 ‘Pumpkin’부터 앤디 워홀의 ‘Flowers’까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물질계 작품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향긋한 향수 향기와 함께 전시장을 지나가면 'Spiritual Luxury'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통해 럭셔리를 정의한다. 김환기 작가의 ‘아침의 메아리’는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이 주는 특유의 색감과 감각이 신비롭고 독특했다.
김환기 작가 특유의 푸른 색감은 새벽과 아침 사이의 선선하고 시원한 감각을 주는 듯했다. 언뜻 루비나 사파이어,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처럼 보이는 반짝이는 별들은 작품의 서정성을 더했다. 마치 눈앞에 새벽녘의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추상의 영역에서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지나 도착한 ‘Timeless Luxury’ 섹션에서는, 시간이 주는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실사처럼 정교한 백자 그림과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된 백자 작품이었다.
하나의 백자를 빚어내기까지, 혹은 그 백자를 그림으로 구현하기까지 쏟아졌을 수많은 시간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백자에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작가의 노고와 축적된 시간이 작품에 스며 있어 더욱 깊은 감동을 주었다. 문득, 진정한 ‘럭셔리’란 결국 시간의 밀도와 손끝의 정성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 깃든 시간과 정성의 가치를 충분히 느낀 후, 전시의 마지막은 공간 자체가 주는 고요함과 여유로 이어졌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4층은 흥선대원군의 별서였던 석파정 일대와 별관 전시관으로 연결되는데, 날씨 좋은 날에는 전시관에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 뒤 자연 내음이 가득한 석파정을 꼭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흙길을 따라 산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독특한 정취를 지닌 석파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 후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연과 역사가 깃든 이 공간을 마주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전시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진정한 럭셔리는 긴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자연스레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 전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럭셔리의 가치를 다채로운 감각들로 전하고 있었다. ‘럭셔리’라 하면 물질적 의미의 값비쌈만 떠올리던 이전과 달리, 하나의 작품에 투영된 시대 문화적, 정신적 측면의 ‘럭셔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럭셔리를 추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땐 ‘럭셔리’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 보면 어떨까. 나에게는 가족과 함께 가치 있는 작품을 감상하고,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자연 속에서 상쾌한 기분을 느꼈던 이 시간이 더없이 ‘럭셔리’했다. 일상에서 아주 잠깐의 여유를 갖고자 한다면, ‘Art of Luxury’ 속에서 자신만의 럭셔리를 조용히 마주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