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바람은 차갑고, 말은 적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얼어붙은 계절을 배경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며칠을 걷고, 끝내는 각자의 길로 나아가기까지. 그 사이에 감정은 서서히 녹아 흘러간다.
싱가포르 출신 안소니 첸 감독의 신작이자 제76회 칸영화제 초청작인 이 영화는 오는 6월 4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독은 이 작품을 “불안한 청춘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 말한다. 팬데믹 이후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머물러 있던 마음들을, 얼음이라는 물성과 감정으로 차분히 써내려간다.
*
본문 중간 아주 조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의 부탁드립니다.
경계의 도시, 연길
연길. 중국과 북한의 국경 도시이지만, 간판에는 한글과 중국어가 함께 걸려 있고, 사람들은 조선말과 중국어를 오간다. 이질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이 도시는,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정서를 안고 있다. 어딘가에 닿고 싶지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감정. 영화는 이 도시를 배경으로, 그렇게 미묘한 경계에 선 마음들을 따라간다.
감독은 이 공간을 "중국이지만 중국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이라 말했다. 말과 말 사이, 풍경과 사람 사이, 언어와 침묵 사이에 선 인물들이 이 도시 안에서 서로를 만난다. 그들은 어떤 이름도 쉽게 붙일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한 채, 하루하루를 천천히 통과한다. 연길은 단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지형이 된다.
멈춰 있는 마음들을 마주한 청춘
〈브레이킹 아이스〉가 그리는 청춘은 어디로도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기엔 아직 미완이고,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고 하기엔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멈춰 선 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가슴속에 꼭 붙든 채 살아가는 이들. 영화는 그 멈춤의 시간을 조용히 꺼내어 보여준다.
영화 말미, 샤오는 조카 옆에 누워 있다가 말한다. “이제 너 혼자 누워 있어. 난 떠날 거야.” 그 말은 마치 어린 자아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들린다. 나나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시절, 피겨 스케이팅의 기억과 조용히 마주하고, 오래도록 연락을 끊고 지냈던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하오펑은 누구보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목에 찬 시계처럼 자신을 조이는 기준과 기대를 놓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 시계를 푸는 순간, 그는 조금씩 그 틀에서 벗어난다.
셋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붙잡아두고, 내려놓지도 못한 채 덮어두고 있던 것들을 마주한다. 꺼내기 어려웠던 감정, 오래된 후회, 놓쳐버린 무언가. 그것들을 마주한다는 건 스스로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말하는 ‘성장’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감정은 그렇게 얼음처럼 녹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 영화는 그 해빙의 시간을 따라간다.
감정을 감각으로 말하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감정을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다. 인물의 걸음, 시선, 풍경의 온도가 감정을 대신한다. 잔잔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인물을 오래 따라가는 시선. 그 방식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설명보다 여운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얼음은 낮은 온도에서 단단하게 굳지만, 수면 위로 꺼내 놓으면 순식간에 녹아 다시 물이 된다. 감독은 말한다. 얼음과 물이 순환하는 구조를 인물들의 관계에 적용해보고 싶었다고.
〈브레이킹 아이스〉는 차가운 감정으로 시작해, 결국은 다시 흘러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다다른다. 그 끝에 있는 건 변화가 아니라, 회복이다. 큰 사건은 없지만, 조용한 감정이 꾸준히 밀려든다. 감동보다는 여운, 서사보다는 정서가 이 영화의 중심이다.
만약 요즘, “나는 괜찮은 어른일까?”라는 질문이 자주 마음속을 맴돈다면, 이 영화는 그런 당신에게 말없이 다가올 것이다. 누구보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며.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진심. 그것이 〈브레이킹 아이스〉가 지닌 가장 따뜻한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