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핏줄로 연결된, 우리가 가장 최초의 관계이자 천부적으로 부여된 관계이자, 어떤 때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한 인간이 신이 점지한 운명을 감히 거스르려다 결국에는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무력함과 신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피로 이어진 가족이란 존재가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해 더욱 흥미롭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우리는 가족이 어쨌거나 좋은 것이고, 가족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신념을 유지해 왔다. 그건 어쩌면 여럿이 있어야 안전하고 생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의 중요성에 관해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호소하는 말을 뜯어보면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이라는 것, 참 희한한 풍경이다.
가족이라는 것에 관한 논의, 기존의 가족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거나 의문을 제기한 것은 현대 사회에 와서 더욱 많아졌다. 우리는 원래의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흔히 ‘대안 가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
‘대안’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 때문에 그런지 이 말은 마치 기존 가족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단 하나의 해결책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대안 가족에 대한 논의는 꽤 많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중 90년대 일본에 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공동육아’라는 말에서 공동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영화 <침몰 가족>은 조금 독특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감독 가노 쓰치가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가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자전적인 다큐멘터리다. 그는 어머니가 모집한 수십 명의 낯선 어른들이 결집한 육아 공동체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잊힐 듯 말 듯 할 즈음 그는 자신을 길러준 어른들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영화 <침몰 가족>의 시작이다.
가노 호코가 그의 엄마다. 호코는 1994년 아들의 생부와 헤어져 미혼모가 된다. 특히나 90년대에! 여성 혼자 일을 병행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노 호코는 전단지를 돌려 불특정 다수의 어른에게 공동 육아를 제안한다. 그렇게 해서 북적북적한 가족이 탄생했고 그것은 ‘침몰 가족’이 되었다.
독특한 컨셉에 놀라는 것도 잠시 피 양육자인 감독이 추적한 ‘가족의 탄생’을 지켜보다 보면, 이 침몰 가족은 의외로 정말 정교하게 설계된 공동체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침몰 가족’에는 이름과 다르게 견고한 책임과 규칙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공동 ‘육아’를 적극 지향했다. 편안하게 저녁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어도, 아기 가노 쓰치를 키우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가족회의를 정말 자주 했고 대부분의 구성원이 그런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이들이 구성한 가족이 자유로움을 추구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가족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규칙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가노 호코가 ‘엄마’이자 한 사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시작될 수 있었다. (사실 가노 호코는 자신이 이루어 온 모든 관계에서 중심이 되고 싶지 않다지만 말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폐쇄적이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선호하는 그다운 생각이다.)
그는 이미 엄마의 자아가 붕괴되면 곧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임을 직감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호코는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선택하듯이 어머니에게 육아와 관련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어머니와는 크게 살가운 관계도 아니었고, 오히려 함께 육아를 한다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과의 지속적인 교류였다.
‘지속적인 교류’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다시금 침몰 가족의 구성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동 육아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원의 대다수는 20, 30대 남성들, 게다가 특별히 일을 한다거나 폭넓은 인간관계를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흔히 우리가 육아를 할 때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히려 자발적으로 공동 육아에 참여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것의 역할이 육아를 하면서, 즉 새로운 인구 구성원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기존 구성원의 자아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붕괴를 막으면서 지속적인 인구 재생산을 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면 ‘인위적으로’ 구성되어도 ‘자연스러운’ 가족과 같이 유지될 수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가족을 꾸려 원 가족의 결핍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만족감을 얻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삶에서 이 모든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나온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