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결과를 알린 건 병원으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였다. 식당이라 주변은 소란하고, 음량을 최대치로 올려도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탓에 몇 가지 내용은 놓치기도 했다. 결국 신장인지 심장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를 반복하다 전화를 끊었다.
“신장이겠지?”
결론적으로 ‘무언가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막 20대 중반을 들어선 나이를 위안으로 삼기에는 최근 들려오는 ‘젊은 암 환자’에 대한 기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건 나의 안 좋은 습관이다.
전화를 끊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건강검진을 받지 말 걸 그랬나’하는 후회였다.
평소에 검진을 미루다 병을 키우는 사람을 보면, 검진을 제때 받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 일이 무색하게 막상 내 일이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무지(無知)만큼 불안을 키우는 일도 없기에 빨리 정밀 검진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병원을 찾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바빠서는 아니었다. 마음먹으면 그날 당장 예약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작은 핑계가 생기면 그걸 빌미로 검사를 미루기 일쑤였다. 가까운 병원에 전화를 걸어 CT를 찍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가 ‘장비가 없다.’는 말에 전화를 끊었다. 다른 날, 다른 병원에 전화를 걸어 ‘CT 촬영은 가능한데, 결과 분석을 받을 수 있는 과가 없다’고 하면 또 거기서 그만뒀다. 그날에 차례대로 다음 병원을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내심 결과가 나쁠까 봐 겁이 났다.
결국 CT 촬영과 진단 협진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예약했다. 진료실에 들어가기까지도 매우 긴장된 상태였는데, 막상 의사 선생님은 내 검사지를 보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도 정말 별일이 아니라 그런 것인지, 단순히 무표정한 분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불안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의심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예정된 검사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검사를 마치고 다시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은 누군가와 통화를 마무리하고 계셨다. 내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이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과 확인 통화를 끝냈다고 알려주셨다.
결과는 건강검진 검사상의 ‘오진’, ‘이상소견 없음’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안심이 되는 한편, 그간 몸 어딘가가 콕콕 쑤시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있지도 않은 병을 탓했던 날들,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 온갖 빌미를 찾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막연한 불안, 공포, 두려움, 그런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면 진단은 본디 그런 역할을 해왔다. 검사 결과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처럼 비염이라 생각하고 병원에 갔는데 축농증이었을 때, 원래 먹던 약만 처방받으러 갔는데 다른 질병을 진단받았을 때, 진단이라는 것은 명확함으로 ‘막연함’을 밀어냈다.
우리는 질병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진단’을 원한다. 고민 상담을 하는 건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막연함'이 더해지는 순간,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게를 가늠하고 싶어 한다. 진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진단을 내린다는 것은 임계점을 그어주는 것이다. 그 선 안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지, 멈출지, 물러날지를 선택하게 된다. 2025년은 홀수 해에 출생자가 건강검진을 받는 해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사회이지만, 그 속에서도 확실함을 늘려가는 날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