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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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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위한 것과 나를 위한 것

 

예술 행위란 어쩌면 개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을 공개하는 것과 같다. ‘날 것의 향’이 나는 솔직하고 담대한 작품들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동시에 예술 행위는 남의 공감과 관심을 먹고 확장되기 때문에, 개인의 시각을 완만히 정제하여 타인에게 이해시키려 고군분투하는 일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적인 입맛에 대항해 ‘고리타분한’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급히 변해가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기 일쑤다. 작품이 박수받기를 바라는 인정욕구는 예술 분야와 불가분한 영역이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이 최대한 많은 이에게 닿아서 그들의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길 바란다. 그렇기에 고유의 세계관이 존재한다면, 문을 열어 대중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중의 눈이 향하는 곳에 언제나 예술가 본인이 추구하는 예술이 존재하는가? 미셀 하자나비시우스의 영화 <아티스트>는 대중의 눈에 맞춰 예술 행위를 조정할 것인가, 아니면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을 고집 있게 신뢰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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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속 프레임, <아티스트>의 형식과 특징

 

<아티스트>는 무성영화가 쇠퇴해 가던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기술 발전의 산물인 유성영화가 성행하기 시작하던 영화계의 과도기를 묘사한다. <아티스트>의 특징이라면, 영화 속 관객과 우리가 영화를 함께 보는 극중극 구조를 이룬다는 점이다. 무성영화 산업이 몰락하는 현상을 담아내는 영화 자체가 무성영화라는 점과 무성영화 속에서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전개는 마치 우리가 조지의 작품을 보는 것만 같은 독특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프레임 속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은 모든 게 영화 속 사건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전지적 시각을 지니게 된 관객들은 보다 의연하게 영화의 형식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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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영화의 등장, 그리고 마침표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를 만들고 연기하는 인물이다. 엄청난 유명세를 누리는 그는 무성영화의 트렌드를 주체적으로 건설한 선구자이다. 영화 초반은 환호와 동경의 대상인 조지의 모습, 그리고 그의 영화가 수많은 관객에게 선보여지는 장면들로 이뤄진다.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큰 스크린 앞에 선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는 무성영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캐릭터로서, 소리에 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가 추구하는, 그리고 탄압받는 무성영화의 가치는 상징적이고 배경적인 요소들로 강조된다. 조지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의 백스테이지에서는 마치 그의 절규를 담은 듯한 ‘BE SILENT!’(조용히!) 문구가 꾸준히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소리로 고문당하는’ 그의 모습 또한 문화 격변으로 인해 스러져 갔던 수많은 예술인의 비명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들은 당대 무성영화 업계가 ‘시끄러운’ 영화를 만났을 때 어떤 혼란을 겪었을지 시사하며, 동시에 조지가 열렬히 사랑한 시대에 강제적인 마침표가 찍힐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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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피의 시대, 조지의 유산

 

이런 조지와 완벽히 대비되는, 영화산업의 무궁한 발전을 꿈꾸는 또 다른 주인공, 페피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할리우드의 모습을 체내화하고 빠르게 시대에 적응하는 그녀는 조지의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유명세를 누린다. 같은 레스토랑에서 기둥 하나를 두고 앉은 둘은 완전하게 상반된 관점을 대표한다. 페피는 무성영화의 고리타분함을 비난하고, 이를 들은 조지는 크게 상처받는다. 이내 조지는 “내가 당신의 길을 만들어 주지 않았느냐”는 울분 섞인 말과 함께 자리를 뜬다. 그 말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물론, 페피는 조지만큼이나 영화를 사랑하고, 후반에는 조지를 구원하는 존재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아티스트>는 무성영화를 경멸하는 페피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는 조지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열광하는 오늘날의 영화산업이 어떤 역사를 밟고 서 있는지 묻는다. 페피의 모습은 나로부터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고전적 미학을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 말하는 페피를, 우리는 조금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손을 잡고 뒤따르는 이와,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이—둘은 너무도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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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을 끌어안고

 

조지는 영화계에 이는 큰 파도를 페피처럼 유연히 타기보다는 꼿꼿이 버티다 가라앉는 인물이다. 무성영화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그의 귀에는 깃털 떨어지는 소리를 포함한 모든 소리가 굉음으로 들린다. 반대로 현대에 적응이 불가한 그가 내지르는 소리를 남들은 듣지 못한다. 자신의 소리도, 남이 내는 소리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꾸만 어그러진다. 조지가 타인 간의 소통 두절에서 끝없이 변모하는 예술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예술의 팽팽한 갈등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조지가 하는 말이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 장면은, 쇠퇴한 시스템을 부여잡고 버티는 이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변화하는 ‘LTE 사회’를 상징한다. 또한, 그의 귀를 때리는 붕괴음은 무너지는 무성영화 업계가 내는 붕괴음이기도 할 것이다. 조지는 신념의 종말을 깨닫고 잔여물을 모두 태워버리다가도, 영화 필름을 온 힘 다해 끌어안은 채 화재에서 구출되기도 한다. 이런 그의 아집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것의 소멸에 아이처럼 우는 그를 보며 냉소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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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또다시, 영화!

 

영화는 이 모든 치열한 분열의 끝에 ‘조화’를 제시한다. 2011년 영화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고전으로의 회귀를 이루며, 발전에 못 이겨 소멸해 간 산업의 역사와 현대의 화해를 그려낸다. 페피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시대에 적응해 나가는 조지는 이내 새로운 영화를 위한 오디션과 촬영 현장에서 페피와 탭댄스를 춘다.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음악과 구두 소리가 아름답다. 점점 소리가 입혀지는 대사들과 말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탭댄스, 유성과 무성의 조화에 미소 짓다 보면, “액션” 소리와 함께 현장의 사람들과 장비가 롱 샷(long shot)으로 담기며 영화가 끝이 난다. 고전이든, 모던이든, 영화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이토록 영화다운 영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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