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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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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유난히 어렵게 느껴지는 장르가 있는데 내게는 판소리가 그랬다. 작품의 메시지보다는 ‘소리’라는 것에 몰두한 장르가 아닐까, 하는 좁은 생각 때문인가. 그럼에도 요즘은 편향된 습성을 조금씩 깨보고자 한다.


3월 개막한 <적벽>은 2017년 초연했으며 올해로 6연을 맞았다.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적벽대전’을 소재로 하는 공연이다. 부패와 혼란의 정세 속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무대화되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감이 올랐다.


흰색 배경으로 이루어진 무대는 1층과 2층으로 공간 분리가 이루어져 있었고, 양옆으로는 오르막길과 작은 계단이 자리했다. 무대는 간결할수록 채워질 것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심플하게 만들어진 무대 구성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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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붕 연출가는 “역사 속 영웅들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닌 민중들의 문학이자 공연으로서도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의 의도대로 공연은 원활하게 흘러간듯하다. 공연을 보면서 역사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넘어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 이야기보다는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낯섦보다는 친근함이 컸다. 중간중간 웃음을 유발하는 소소한 재미와 배우들의 찰진 대사 덕분인 것 같다.


음악은 라이브로 연주되었고, 밴드는 무대 뒤편에서 제 나름의 혼신의 힘을 다하며 극을 한층 더 풍부하게 이끌어갔다.


최근에 시드니 여행을 갔다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트라비아타’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작은 습성을 깨달았는데, 배우들의 연기와 오케스트라 연주, 지휘의 합을 감상하는 데에서 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장면이나 배우의 감정이 고조되는 씬에서는 배우의 연기보다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쫓느라 눈이 바빴다. 장면과 노래에 따라 악기를 잡는 연주자들의 손의 모양, 속도, 지휘봉을 다루는 지휘자의 표정은 매번 달랐다. 악기는 연주되기 전부터 연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 뒤편에서 연주하는 밴드를 한 명 한 명 살피느라 눈은 또 어김없이 바빴다. 그들의 손과 표정, 입 모양, 발, 제스처, 그리고 리듬감은 배우들의 연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실은 무대 뒤에서, 혹은 무대 아래에서 모두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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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젠더 프리 캐스트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한나라의 인자한 군주였던 ‘유비’는 여성 배우가 맡았다. 온화하면서도 단단한 리더의 면모를 보인 캐릭터였는데, 강인한 여성의 면모가 돋보인 역할이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특성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캐릭터는 ‘장비’였다. 그는 호탕했고 때로는 불같았다. 그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장비’를 맡은 배우는 걸음걸이부터 제스처까지 ‘장비’의 것을 만들어 연기했다. 꼿꼿이 걷는 ’유비‘와 달리 ’장비‘는 떡 벌어진 어깨로 약간 뒤뚱뒤뚱 걸었다. 목소리도 남들 보다 조금 더 우렁찼다.


배우가 가진 본연의 껍질을 잠깐 벗어두고 새로운 인물의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면, 마음이 조금 더 기운다. 이러한 성격을 표현하고자 저런 걸음을 만든 건가, 인물이 자주 하는 습성은 저런 행동이라고 생각했나..등. 여러 가지 궁금증을 안은 채 ‘장비‘의 서사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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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적벽>의 가장 큰 매력은 객석을 압도하는 퍼포먼스가 아닐까 싶다. 박진감 넘치는 노래와 세련되면서도 심플한 의상, 화려한 조명, 오랜 연습의 흔적이 보이는 배우들의 퍼포먼스, 그리고 라이브 밴드까지, 이 모든 합이 <적벽>을 감동적인 공연으로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은 100분 동안 이루어졌으며,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동안 여러 노래가 나왔는데 노래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는 빠지지 않았다. 웅장함에 압도되어 넋을 놓고 감상하다가도 절묘하게 노래가 끝나면 재빠르게 박수를 쳤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배우들과 이 무대를 올리기까지의 수고로움에.


이번 공연 감상을 계기로 판소리가 더 이상 어려운 장르로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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