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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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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옷을 두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했던 주말. 낮 기온 19도에 미세먼지 좋음이라서 날씨에 대한 예의를 차리러 밖으로 나갔다. 익숙한 산책로를 향해 가는 길이었지만 시선은 여기저기 훑기 바빴다. 뭐라도 톡 터뜨려 피울 것만 같은 이 포근한 기세가 길가의 풍경을 어딘가 조금씩 바꿔 놓았을까봐.


체크 포인트 두 군데가 있다. 벽돌 담장 울타리 그리고 세탁소 키다리 나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마주치는 적색 벽돌 담장의 울타리 너머는 해마다 피는 개나리 군단의 고정석이다. 가지치기를 했는지 현재 까까머리 상태다. 조금 더 내려간 세탁소 앞의 키 큰 목련나무도 대왕 팝콘 같은 꽃은 아직이었다. 완연한 봄은 아닌 것 같아 걸음 매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허나 거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단지 시기가 아닐 뿐 못 보는 건 아니니 말이다. 매년 제때에 피어나 자기를 스쳐가는 사람을 누구보다 환대했던 존재들이다. 개나리와 목련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꽃보다 이 영화가 내게 먼저 닿았다. 팬 위에서 피어난 동그랗고 보드라운 빵이 담장의 개나리꽃보다, 길가의 목련꽃보다 더 빨리 나를 찾아왔다.

 



도라야키가 동그랗게 피어났습니다


 

*도라야키: 도라=징, 야키=굽다. 둥근 모양의 징 같이 둥글납작하게 구운 두 반죽 사이에 팥소를 넣은 일본 전통 화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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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답게 벚꽃나무의 흐드러진 춤이 한창이다. 해사한 벚꽃이 무색하게 그 옆 도라야키 가게의 점장인 ’센타로‘는 하루하루가 그저 고단하기만 하다. 그는 봄바람이 부는지도 몰랐다. 지척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다.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인 가게에 발이 묶여 계속 일해야 하는 처지였다. 도망인 듯 타협인 듯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도라야키 빵을 만들 뿐이다.


시판용 팥소로 그럭저럭 빵을 만들어 팔며 가게를 운영하는 그에게 어느 날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데...”


센타로의 정중한 거절에도 76세 할머니 ’도쿠에‘는 온화하면서도 집요하게 계속 찾아와 본인을 어필한다. 평소 가게의 빵 팥소에 문제를 느꼈던 그녀는 “단팥은 마음으로 만드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최후의 필살기로 직접 만든 단팥을 센타로에게 건넨다.


아르바이트 지망생 할머니가 맛보라고 준 단팥이 그의 뒷통수를 제대로 때렸다. 단 거 안 좋아하는 입맛이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맛있다는 건 잘 알겠다. 가게 단골 손님인 여중생 ’와카나‘도 옆에서 한몫 거든다. 할머니에게 기회를 한번 드려 보라고.


이번엔 그녀를 꽉 붙잡으리. 어김없이 가게에 찾아온 도쿠에 할머니가 세상 반가운 센타로다. 지체없이 가게의 단팥 담당직으로 할머니를 바로 고용한다. 생각지도 못한 합격에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한없이 고맙고 벅차다.


예사롭지 않은 단팥 장인과 이제 막 영혼이 실린 허수아비가 인연을 맺었다. 도라야키 가게에 왠지 알 수 없는 생기가 돈다.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의지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동그랗게 피어났다.




그녀의 우주 ’단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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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은 도쿠에 그녀가 평생을 바쳐 일궈 낸 우주다. 자그마치 50년. 반세기 동안 온 정성을 다한 것이 팥이다. 진심을 다해 만들어도 모자란 것이 단팥이기에 그 과정에서 적당히는 있을 수가 없다.


자고로 도라야키의 생명은 단팥! 그런데 이곳에 업소용 팥소가 웬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말통에 담긴 팥을 쓸 수가 있냐며 젊은 점장을 나무란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절대 타협할 수 없기에 센타로와 함께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단팥을 만들기로 한다.


그렇게 2인 1조 팀플레이로 진정한 단팥 만들기가 시작된다. 불리는 팥을 들여다 본 적도 없는 뭘 모르는 점장은 일단 그녀의 지시에 따라 아바타처럼 움직였다. 물에 불리고, 상태가 안 좋은 것을 골라내고, 삶고 헹구며 다시 물을 붓고. 하긴 하는데 초짜의 움직임은 죄다 서툴고 지켜보는 달인은 답답하기만 해서 어쩐지 서로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아도 장인의 모든 센서는 팥을 향한다. 어딘가 달라진 김 냄새에 졸음이 달아난 그녀가 거의 다 된 것 같다며 센타로에게 알린다. 그는 이런 과정들이 딱히 와닿지 않는다. 김 냄새는 그저 복잡한 김 냄새일 뿐.


’진정한 단팥‘이라고 했지만 사실 만드는 비법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일, 밭에서 여기까지 힘들게 와 준 팥을 극진히 모신다. 이, 단팥이 되어 가는 매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삼, 이 모든 일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꼭 인지한다. 결국 긴 기다림에 나가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리. 졸졸 거리는 물줄기로 떫은 물을 흘려보내고 설탕물에 팥을 넣고 잠시 기다리는 순간에도 센타로는 언제까지 계속 지켜보냐며 보채기 바쁘다.


멀고 먼 장인의 우주.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인생 첫 단팥을 만나게 된 센타로다. 소중한 결실을 빵에 발라 한입 베어 무는데 미소가 절로 새어 나온다. 살면서 도라야키 하나를 다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순간은 그 예외라 얼떨떨하다. 단팥 맛이 좋아졌다며 손님들 반응도 뜨겁다. 장인의 손길 때문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다들 귀신같이 알아본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게에 활기가 돈다.


그녀의 우주가 모두를 잡아당긴다.


 


지난한 시간 속을 통과하고 있는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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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일상에 숨통이 좀 트이나 보다 했다. 이제서야 제대로 된 도라야키를 만드는 것 같아 조금은 덜 부끄럽게 됐다.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가게 사모가 압력을 넣는다. 같이 일하는 할머니가 나환자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 빨리 해고하라고. 부부가 대납해 준 위자료로 아직 갚을 게 남아 있는 센타로는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하기만 하다.


가게를 며칠 쉬기로 한 날, 백발의 아르바이트생 도쿠에는 혼자 단팥을 만들러 나왔다가 얼떨결에 장사까지 해 버린다. 잠깐 가게에 들른 점장이 놀라서 묻자 찢어지고 타버린 빵도 많았지만 어쨌든 잘 팔았다고 이참에 영업 보고도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 굴하기보다 뭐든 시도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갈피를 못 잡는 센타로의 마음까지 돌려놓는다.


하지만 소문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결국 그녀도 가게를 관두게 된다. 혼자 남아 있을 센타로에게 도쿠에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팥의 긴 여행 이야기를 듣는 일. 세상 모든 것들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데도 타인은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지...그때가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때인 것 같아. 언젠가는 센타로 사장님만의 특별한 도라야키를 만들어 낼 거라 믿어. 사장님은 해낼 수 있어!”


소중한 이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할머니를 보러 가자는 와카나와 함께 센타로는 그녀가 있는 한센병 요양 격리 시설로 향한다. 수척해진 그녀를 마주하는데 눈물이 왈칵 터진다. 할머니를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서, 나까지 상처를 준 것만 같아서. 아련한 추억에 잠긴 듯 그녀는 그동안 고맙고 즐겁고 기뻤던 시간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영원한 이별을 미리 예감한 사람처럼 도쿠에는 두 사람을 위해 음성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거기에는 누구보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한 영혼의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었다. 와카나가 맡긴 새장 속 카나리아는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냥 풀어 주었다고. 센타로 사장을 처음 본 날의 눈빛은 예전의 자기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의 눈빛이었다고. 도쿠에는 끝까지 당부한다.


“이 세상을 보기 위해 태어난 것을 절대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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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떠났고 벚꽃나무가 바람에 또 흔들렸다. 그 아래에는 센타로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서 있다. 3년 전의 과거로 그녀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처럼 살아 나가는 일을 다시 어여쁘게 여기기로 한다. 두렵지만 지난한 시간들로부터 한 발짝 떼어 본다.

 

“도라야키 사세요! 도라야키가 왔어요!”


센타로의 목소리가 공원을 가득 채웠다. ’맛있는 도라야키‘라고 적힌 가게 깃발이 곁에서 그를 지켜준다.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봄을 맞는다.




인생 도라야키를 만나는 순간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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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잘나고 반짝이는 사람들만 특별한 것 같은 세상에서 개인의 뒤처짐은 유난히 도드라진다. 좋은 날보단 한없이 미미해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더 많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도 다 뻥 같다. 알고 보면 다들 진심으로 실패하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분명해지는 부분이 있다. 하루하루 제자리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마음 알아주는 건 오직 나뿐이고, 거기에는 상당한 인내심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밥먹듯이 하는 실패에 매번 비위가 상하면서도 이상하게 이 합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싶다. 속상할지언정 그 결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찢어 먹고 태워 먹으며 서툴게 빵은 구웠어도 끝내는 도라야키를 완성한 도쿠에 할머니도 그런 마음이셨을까?


아차 하면 내게 온 봄도 깜빡할 것 같아 재빨리 도라야키를 감각해 보았다.

 

[’나는 참하고 정직한 저 동그란 빵처럼 어여쁘다.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히 고유하다. 빵 속에 감춰진 팥소처럼 아직 꺼내지 않은 삶의 의지가 내 안에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단맛이 꼭 팥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 팥이 아니면 어떠하리. 생크림, 슈크림, 누텔라 초코잼, 사과잼, 딸기잼, 포도잼, 치즈, 버터 등등이 될 수도 있겠지. 속은 각자의 것으로 치환할 것. 나의 결대로 어떻게든 성숙해지면 그뿐 아니겠는가‘]라고 최면을 걸었더니 아직 인생 도라야키를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법 희망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뭐가 다가올진 모르겠지만 지난한 시간이 될 거다.


별 수는 없다. 동그란 도라야키를 방패 삼아 묵묵히 한 발짝 또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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