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막 기괴한 큰 몸뚱이랑 미친 모양 큰 머리랑 다 봤어요? 그리고 그 입. 완전 미친 것 같은 입들”
팔다리를 흩어놓고 바르작거리는 곤충을 자기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들처럼.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는 끔찍해서 유치원 벽에 걸린 모작을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났지. 그런데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그 끈덕진 유화. 사람을 향한 지독한 외로움. 숨 막히는 기름의 향내를 상상하면서. 귀를 잘라내는 고통의 가장자리도 되지 못할 경험을 더듬거리면서. 내 평생에 짐작도 못 할 고통을 자꾸만 더듬거리게 했어. 그가. 반 고흐가. 빈센트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빛무리들은 나를 부숴놓고 흐트러트리는 아이들의 천진한 손아귀처럼.
“그 막 기괴한 큰 몸뚱이랑 미친 모양 큰 머리랑 다 봤어요? 그리고 그 입. 완전 미친 것 같은 입들” (연극, <마우스피스> 중 데클란의 대사)
흥분한, 달뜬 목소리로 벅차서 말을 쏘아대는 데클란을 상상한다. 그림이라고는 한 점도 실려있지 않은 야닉 에넬의 <블루 베이컨>을 읽으면서. 온통 활자뿐인 것에서 두 사람이 홀렸을 베이컨의 그림을 상상했다.
내 평생에 나를 홀린 화가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나는 그를 지독하게 무서워하면서 눈으로 좇았다. 어린 시절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귀가 잘린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봤을 때부터 자라오면서 어디서든 그 이름과 이야기와 그림을 들을 때면 몸서리를 쳤다. 더듬거려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 외로움의 깊이를 두려워하면서. 그럼에도 이상한 끌림. 나를 잡아당기는 것.
그림 앞에서 오히려 내가 사라져버리는 경험. 이윽고 고통을 느끼며 내가 다시 환해지는 기분. 내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라도 된 듯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경험. 아니, 크리스마스의 꼬마전구가 아니라 수명이 다해 터져버리는 전구가 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너무 뜨거워진 나머지 제 몸의 열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필라멘트가 터져버리고, 이윽고 그것을 둘러싼 푸르스름한 유리 육체마저 퍽석 소리를 내며 박살 나는 그런.
베이컨의 이야기도, 그림도 한 점 없었다. 베이컨의 그림을 소개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목적을 방기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엇보다 훌륭하게 그림을 소개해냈다. 그림이 쳐들어와 자신을 완전히 빠개놓는 그 경험, 그로 인해 파랗게 점멸하는 자아를 트라마돌 두 알과 와인과 잠의 혼란함 속에서 야닉 에넬은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것은 베이컨의 그림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남긴 감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끝내 독자가 베이컨의 그림을 찾아볼 수밖에 만든다. 그리하여 책 내부의 저자와 외부의 독자 모두가 고통에 휩싸인다. 그림들과 오롯이 함께하는 밤에 대한 낭만적 환상 같은 것은 이미 멀리 떠나버린 지 오래다.
“네가 그리는 거랑 좀 비슷한 데가 있지?” (연극 <마우스피스> 중 리비의 대사)
나는 자주 이 대사를 중얼거렸다. 비슷한 데가 있어. 베이컨은 보는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걸까. 그래서 닮게 만드는 걸까. 그 일그러지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 가는 기괴함 속에서, 무엇보다 약동하는 심장을 느끼게 하는 걸까. 아니면 그 거대한 존재감 앞에 감상자를 무(無)로 만들었다가 번쩍 터져버려서 결국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드는 걸까. 책을 덮고 나서야 베이컨의 그림을 다시 찾아봤고 나는 야닉 에넬의 글과 베이컨의 그림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데클란의 흔적을 더듬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목적을 방기하는 에넬처럼, 나 역시도 어쩌면 그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끝없이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에넬처럼 이 책 <블루 베이컨>으로 읽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삶을 살아가는 일, 블루
“그림은 스스로에 대해 명상한다. 그것의 고독은 빛에 속한다. 그때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독은 꼭 거침없이 내쉬는 숨 같다. 무한한 공간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부족한 빛을 마련해준다. 공백은 파란색이다.” (54쪽)
불에 타버린 눈을 대체하는 푸른색. 베이컨의 파랑은 작가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초겨울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일 때 떠오르는 그 푸른색. 베이컨의 파랑은 잃어버린 눈이다. 그것은 샤갈의 봄을 바라고 선 사내의 관자놀이 위 도드라진 파란 정맥* 같다. 이를 생각하자 나는 그 괴물 같은 붉고 짙은 그림 속에서 파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일을 다 겪고 끝났다고 말하는 이야기 속, 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소리치는 데클란의 목소리. 데클란의 발 아래 펼쳐졌을 지독히도 시리게 파란 도시.
“하지만 만약 당신이 베이컨의 세계가 당신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하면, 당신을 빼앗음으로써 당신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다줄 경험이 시작된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당신의 눈은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마침내 보게 될 것이고, 이 두 번째 눈 덕분에 삶의 불타오르는 마음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79)
나를, 눈을 잃어버린 자리가 시큰거리며 아픈 통증을 느낀다. 삶이라는 것은 끝없이 연속되는 상실의 집합체. 나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터져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쌓아 올린다. 그게 삶이라면, 베이컨의 그림을 보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삶을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시구 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