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바라는 이는 대부분 고통을 겪고 있는 이다. 누군가 말하는 희망이 눈에 띄게 밝을수록 그는 지금 아주 어두운 곳을 지나고 있을 거라고. 나는 가끔 그렇게, 감히 그의 사정을 예측해 보곤 한다. 행과 불행이 등배처럼 서로를 이고 지며 부대끼듯 존재하고 있다면, 그 극단의 것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며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면, 삶에서 찾아오는 상승과 하강을 그리 겁낼 필요도 없을 테다. 하강의 고통을 상쇄할 만한 설레는 상승이 곧 다가올 것이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강과 상승의 교차가 필연적인 순차를 지키며 삶에 다가온다는 법칙은 없다. 다만 불행을 겪게 되는 어떤 이들은 곧 다가올 상승을 믿으며, 삶의 어둠을 희망이라는 주술적 믿음에 기대어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애석한 사실이다.
희망이라는 그 주술적 믿음, 그것은 이야기에 대한 믿음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이야기는 결국 언어고, 언어는 영원히 진실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언어를 듣고, 쓰고, 말하는 이유는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절망 이후에 희망이 올 것을 기대하는 마음처럼, 이야기가 현실을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이야기 근처로 끌어당기게 하는 유효한 믿음으로 작동한다. 결국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실제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야기가 현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행과 불행이 무작위로 판을 치는 삶이란 난장에서 다만 하나의 간절한 희망으로 부여잡을 수 있는 삶의 동아줄이 된다. 스크린의, 종이의, 무대의 이야기가 그 표면을 뚫고 나와 실제의 나에게 와 닿는 신비로운 순간을 경험해본이라면 아마 이에 공감할 것이다. 이 기묘한 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이야기는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이야기의 힘을 아주 간절히 믿는 누군가의 노력이자 이야기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겠다. The Fall. 제목부터 추락을 뜻하는 이 영화. 상영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 영화는 삶의 어둠을 지나는 어떤 이의 이야기일 것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단 한 컷의 컴퓨터 그래픽 효과나 단 하나의 세트장 없이 환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낸 것으로 유명한 이 영화가 과연 어느 정도의 절망을 겪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느 정도의 절망을 겪어내기에 이토록 황홀한 이미지를 사용하게 되는 걸까. 희망이 황홀할수록 절망은 깊을 것이며, 희망과 절망의 낙차가 클수록 이야기는 삶에 가닿지 못할 것이 분명할 텐데. 오랜만의 극장 경험이 부디 나의 삶에도 와닿는 이야기로 남을 수 있기를,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두 시간을 보냈다.
추락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삶을 중단하고자 했던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모르핀을 가져올 것을 부탁한다. 그 부탁의 대가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 허무맹랑할 정도의 판타지다. 사고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랑도 잃고 육체의 자유도 잃어버려 절망에 빠진 스턴트맨은 죽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 안에서 가면을 쓴 무법자(블랙 밴디트)가 되고, 주연은커녕 조연조차 될 수 없었던 스턴트맨은 이야기 안에서 당당히 무리 가운데 주인공이 된다. 블랙 밴디트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입을 통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통쾌한 복수극을 겪어내지만, 정작 그 황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은 겨우 얇은 커튼을 하나 친, 남루한 공동 병실의 침상 위에서다.
삶을 중단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그야말로 삶이 추락해버린 그 밑바닥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고도는 두 창작자의 입을 통해 한없이 높아지게 된다. 이야기는 실제의 삶이 자리한 위치와 관계 없이 허구라는 날개를 달고 끝없이 높아질 수 있는 한계 없는 자원이 된다. <더 폴>은 로이가 겪어내고 있는 잔혹한 현실과 그들이 만들어낸 판타지의 격차를 넓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홀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삶이라는 실제와 이야기라는 판타지는 그렇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저 멀리 평행하며 진행되다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만나게 된다. 이야기 속 새로운 등장인물은 그들이 함께 알고 있는 병원의 간호사를 닮고, 이야기를 말하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목소리는 블랙 밴디트와 그의 딸의 입을 통해 들린다. 현실과 허구는 그렇게 뒤섞여 계속 교차한다.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된 알렉산드리아는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게 되어, 종국엔 블랙 밴디트의 이야기를 로이와 자신의 이야기로 간주하게 되지만, 여전히 현실의 절망에 발이 묶여 있는 어른인 로이는 이야기 안으로 깊게 빠져들지 못한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만큼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아직 현실에 깊이 빠져있기에, 여전히 삶과 이야기를 영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며 아주 쉽게 이야기의 고도를 높였지만 결국 그도 삶과 이야기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자신을 위해 모르핀을 전달해 주려다 큰 부상을 당한 알렉산드리아에게 그는 울며 고백한다. 이 이야기는 전부 거짓이고, 이야기 속 인물들은 결국 다 죽을 수밖엔 없다고. 큰 수술을 마치고 누워 있는 어린 아이는 여전히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조르고, 그런 아이를 두고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어른은 이야기를 삶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한다. 이 순간, <더 폴>이 의도한 판타지와 현실의 낙차는 판타지의 낙하로 인해 순식간에 좁아 든다. 로이는 이제 이야기의 모두를 죽여 나가기 시작한다. 삶과 이야기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허구의 이야기도 결국 실제의 삶과 닮기 마련이라는 것을, 결국 블랙 밴디트는 초라한 본인이라는 것을 로이는 이제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로이의 것만이 아닌 알렉산드리아의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결국 이야기는 블랙 밴디트가 죽는 것 대신 그가 그의 딸을 안아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로이가 모르핀을 얻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슬픈 결말이 결정된, 끝이 정해져 있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알렉산드리아라는 공동 창작자이자 등장인물이 그의 삶과 이야기에 등장하였고, 동시에 그의 삶과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로 인해 다른 결말을 맺게 되었다. 블랙 밴디트도, 로이도 달라진 이야기 덕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구가 실제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더 폴>의 믿음엔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이야기는 꺼내어 먹을 수도 없고 바꾸어 입을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맡아볼 수도 없으나 무용하지는 않다. 이야기는 동력이 된다.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건져 올려 줄 수는 없어도 그가 스스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하고, 희망을 바라는 누군가에게 행운을 던져줄 순 없어도 기약 없는 기다림을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라는 거짓은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더 폴>은 아주 순수하게 믿는다. 이야기엔 무조건 삶이 있고, 삶은 이야기를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간단한 믿음에서 시작된 그들의 이야기는 근거 없이도 믿어보고 싶을 만큼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진다. 그 이야기에 대한 믿음과 결연한 태도가 이 영화를 먼 과거로부터 끌어내어 현재의 많은 이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렉산드리아는 관객에게 마지막 나레이션을 통해 로이가 부상을 이겨내고 무사히 회복하여 다시 스턴트맨으로서 영화에 등장하고 있음을 전한다. 하지만 과연, 하반신 마비라는 큰 부상을 입었던 로이가 기적처럼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전처럼 스턴트맨이 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정말 그런 기적이 가능한 일일까? 의문을 품는 관객과는 달리 알렉산드리아는 엄마의 그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는다. 그리곤 얼굴도 잘 식별되지 않는, 아마도 로이일 영화 속 스턴트맨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로이가 부상을 이겨내고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을 알렉산드리아가 믿고 있는 이상, 로이는 영원히 알렉산드리아 안에서 멋진 스턴트맨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남은 건 관객의 몫이다. 몫이자 자유다.